1.
흔히 명품을 볼 때 독창적이고 고급스러운 아이디어와 스타일에만 감탄하면 그건 비전문가다. 전문가라면 그런 아이디어를 실제 물건으로 생산 '가능케' 했다는 점에 혀를 내두를 것이다. 그것도 전시용 프로토타입이 아니라 '대량생산품'이라는 점에 더욱 놀랄 것이다. 한국도 기발한 아이디어에서는 뒤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국제 콘셉트 디자인 공모전에서 한국 학생들이 늘 대거 수상하곤 한다. 그러나 산업 현장에서는 어떤가? 맥을 못 춘다. 왜 그럴까? 다시 한 번 강조하면, 전시장이 아니라 현실 속의 디자인은 디자이너만의 실력으로 구현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 디자인은 기업 경영자와 소비자의 안목은 물론, 기업의 자본력, 조사능력, 기획력, 기술력, 생산력, 마케팅 능력, 유통 능력, 영업 능력 등과 정확히 일치한다. 기술력이나 유통, 마케팅 능력은 떨어지는데 디자인은 좋은 예는 사실 별로 많지 않다. 그리고 디자인만 뛰어나면 대개 일찍 망한다. 디자이너나 나처럼 디자인업계에서 밥 벌어 먹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슬픈 일이지만, 그게 냉정한 현실이다. 결국 뛰어난 디자인은 뛰어난 인프라와 시스템의 '부산물'인 것이다.

2.
<똥파리>의 양익준 감독 인터뷰 기사에서 본, 대만의 허우샤오셴 감독의 말이 기억난다. 양 감독은 그 말에서 큰 가르침을 얻었다고 했다. "생각하는 것은 물 위에 글을 쓰는 것이고 영화를 만드는 것은 돌 위에 새기는 것이다."

3.
브랜드라는 것은 사람들 머릿속에 각인된 어떤 이미지이고 문화다. 그런 이미지와 문화는 기업이 히트 상품 몇 개 냈다고 단숨에 생기는 게 아니다. 브랜드를 키우려면 숲을 키우겠다는 마음 자세가 필요하다. 그 마음 자세는 당장 히트를 쳐서 한몫에 돈을 긁어모으겠다는 생각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참고 또 참아서 하찮아 보이는 나무 한 그루가 숲이 되는 것을 보겠다는 생각이다. 그 마음 자세는 작은 성과들이 모이고 모이게 해서 어느 순간 어마어마하게 축적된 가치를 만들어 낸다. 그러다 보면 덤으로 얻는 것이 히트 상품이다.

4.
매년 3만 명이 넘는 디자이너를 배출한다고 떠드는 우리나라에서 왜 시장 물건은 여전히 디자인이 이토록 낙후되어 있을까? 물론 디자인 선진국이라고 모든 상품들이 다 빼어나게 디자인된 건 아니다. 그들 나라에도 질 낮은 디자인이 없을 리 없다. 단 우리나라처럼 이렇게 그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 다르다. 우수한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물건과 시장에서 가장 흔하게 팔리는 물건의 격차가 좁을수록 디자인 선진국이 아닐까.

5.
미국의 저명한 진화생물학자인 스티븐 제이 굴드는 '단속평형'이라는 독특한 진화론을 주장한 학자다. 단속평형설의 핵심은 진화가 점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느 순간 커다란 변이가 일어나 진화가 이루어지고, 그 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된다는 것.

6.
바둑에는 이런 격언이 있다. "묘수 두면 진다." 기발한 착상으로 멋진 수를 두면 오히려 진다는 것이다. 그 뜻은 정수를 꾸준하게 두면 한 번에 전세를 뒤집는 묘수를 굳이 둘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묘수를 두었다는 것은 그런게 필요할 정도로 상황이 나빠졌다는 거고, 그건 전에 정수를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국이 낳은 위대한 기사 이창호는 이렇게 말한다. "한 건에 맛을 들이면 암수(暗手)의 유혹에 쉽게 빠져들게 된다. 정수(正手)가 오히려 따분해질 수 있다. 바둑은 줄기차게 이기지 않으면 우승할 수 없고 줄기차게 이기려면 괴롭지만 정수가 최선이다."
스포츠나 전쟁에서의 승리, 기업의 성장, 과학과 기술의 위대한 발명, 디자인이나 예술의 걸작은 모두 '한 번의', '결정적인', '기발한', '빛나는', '천재적인' 같은 수식이 붙은 행위나 생각의 산물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화려하지 않지만 정도를 벗어나지 않는 꾸준한 노력의 총합이 만든 결과다.
최근 우리나라는, 아니 세계는 대박, 인생역전, 베스트셀러, 한 명의 뛰어난 인재가 수만 명을 먹여 살린다, 승자독식과 같은 가치를 전파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이런 가치관은 정도를 걷는 노력, 평범하지만 꾸준한 노력을 낮게 평가한다. 또 허풍, 한탕주의, 화려한 전시 행정과 같은 행위를 추구하도록 만든다.


고마워, 디자인
김신 디자인 잡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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