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의 소유물들에 시간의 흐름이 반영된다는 것은 조금도 새로운 개념이 아니다. 예전에는 우리가 보낸 삶의 흔적들이 물건에 권위를 더해주는 것 같을 때가 있었다. 이를테면 베트남전 당시 전쟁사진가들이 동남아시아의 킬링필드를 누비며 끌고 다녔고, 저격수들의 주목을 끌지 않으려고 반짝이는 로고는 테이프를 붙여 감췄으며, 검점 페인트가 벗겨져 나간 틈으로 무거운 황동 바디가 드러났던 상처투성이 낡은 검은색 니콘 카메라가 그렇다. 이런 물건들을 대할 때면 어떤 존경심이 우러난다. 장인의 솜씨가 만들어낸 이 기발한 기계 장치는 버튼을 누르면 미러가 들려올라가면서 우리가 렌즈를 통해 볼 수 있게 해준다. 이런 물건들은 지적인 면과 가치를 반영하는 순정한 물리적 존재감을 지닌다. 렌즈를 연마한 렌즈 제작자들의 솜씨와 셔터 조리개를 결정짓는 금속 날을 디자인한 엄청난 세심함이 약속해준 기능들을 수행해내며 언제까지나 지속될 물건이다. 이러한 특징들은 세월이 지나도 퇴색하지 않는다.

수십 년 동안 우리 곁에 머문 소유물들은 지나온 시간에 얽힌 우리의 경험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에 비해 지금 우리가 새로운 소유물과 맺는 관계는 무척이나 공허하다. 제품들의 매력은 물리적 접촉 우에는 남아나지 못할 외양을 토대로 만들어지고 판매된다. 유혹의 꽃이 시드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그에대한 열정은 거의 구매가 완료됨과 동시에 사그라지고 만다. 욕망은 그 물건이 헌것이 되기 훨씬 전에 희미하게 지워진다. 제품 디자인은 이제 일종의 성형수술 같은 것, 잠시 동안 미모의 환상을 만들기 위해 이마의 주름살을 감춰주는 보톡스 주사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2.

Philippe Starck

스타르크에게는 확실히 말을 다루는 특유의 방식이 있다. "이언 슈레거가 내게 뉴욕에서 100달러로 하룻밤을 지낼 수 있는 호텔방을 디자인해달라고 했다. 나는 그 일에 흠뻑 빠졌다. 뉴욕에서 100달러로 하루를 보내려면 대개는 쥐들과 함께 잘 수밖에 없다." 홍콩의 페닌술라 호텔 최상층 레스토랑의 화장실을 디자인하면서 카오룽의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통유리 앞에 소변기를 설치할 수 있는 사람이니, 재미난 일만 할 수 있다면 자신을 먹여 살리는 사람의 손도 기꺼이 깨물 준비가 되어 있을 터이다. 한 세대의 사람들에게 천재 디자이너가 되려면 에고와 잠시도 입을 다물줄 모르는 수다스러움만 있으면 된다는 인상을 심어주었다는 점만 접어둔다면 그의 무한한 자기중심성도 눈감아줄 만하다. 그리고 여전히 어디를 가든 모든 인습의 문을 습격해 우리를 해방시키는 흥미진진한 우상파괴자인 척하지 않는다면 심지어 개똥철학까지도 용서해줄 수 있을 것이다.


3.

미국의 국내 고속도로 표지판에는 고속도로용 서체인 ‘인터스테이트Interstate’체로 대문자와 소문자를 섞어서 굵고 분명히 알아볼 수 있게 지명을 표시하는데, 그렇게 하는 데는 실용적으로 분명한 목적이 있다. 비가 내릴 때 시속 70마일로 달리면서도, 목적지 도착하려면 어디로 꺾어야 하는지 분명히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터스테이트체는 그 외의 다른 여러 가지 사항에 대해서도 알려준다. 이를테면 그 폰트만 보면 단어 하나 읽지 않고서도 자신이 고속도로에 들어와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영국이 아니라 미국의 고속도로에 있다는 사실도.


4.

조정 가능한 조명 스탠드는 기술과 창의성이 결합되어야 한다. 그것을 제대로 만들어낸다면 기술적인 성취와 더불어 예술적인 야심까지도 보여주는 셈이다. 그리고 작업에 적용할 수 있는 변수들도 아주 다양하다. 기계적 구조에 관한 전반적인 문제가 있고, 손가락 끝의 힘만으로도 움직일 수 있도록 그 구조를 구현하는 방식이 있다. 또한 빛이 적당한 위치를 계속해서 비추게 해주는 구조의 문제가 있고, 광원에 공급되는 전력을 조절하는 수단도 있다. 거기에 빛의 질과 빛이 분산되고 방향을 잡고 음영을 만드는 방식도 다른 요소들만큼 중요하다. 이는 쉽게 수량화할 수 있는 요소라기 보다는 분위기의 문제다.

또 성공적으로 만들어진 조명 스탠드는 아주 오랜 기간 동안 계속 생산된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휴대전화는 6개월마다 새로운 모델에 밀려나고 캐논의 신제품 카메라 개발 주기는 2년이 채 안 된다. 새로운 자동차가 5년 이상 그 매력을 유지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고 그 정도 시간이 지나면 이미 대대적인 외장 개조에 들어간다. 64년이라는 기록적인 세월 동안 꾸준히 생산되던 폴크스바겐의 비틀도 결국에는 단종됐는데, 이미 그 무렵에는 부품이 모조리 바뀐 전혀 다른 차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비틀이 처음 구상된 때보다 10여 년 앞서 나왔던 크롬 도금한 강관 의자는 아직도 대량생산되고 있을 뿐 아니라 변함없이 현대적인 느낌을 준다. 그리고 최조의 조정 가능한 작업용 조명 스탠드인 앵글포이즈Anglepoise는 75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생산되는데, 최근 버전을 봐도 최초의 버전과 아주 유사하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5.

몰턴 자전거(미니의 서스펜션 시스템을 담당한 바로 그 앨릭스 몰턴의 창조물)는 1905년에 변속기어가 발명된 후 60년 만에 이륜자전거 디자인에서 일어난 가장 큰 변화였다. 바퀴가 작고 무게중심이 낮은 몰턴 자전거는 미니만큼 중요한 발전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역시 열정적인 추종자들의 무리를 낳았다. 

미니와 몰턴 자전거와 앵글포이즈는 모두 기술적 혁신과 형태에 대한 창의적 사고가 결합된 디자인이다. 그러나 셋 다 약자다운 면이 있었다. 다들 선구적인 위치를 차지했음에도 더 번드르르하고 더 잘 조직된 경쟁자들에게 뒤지고 만 것이다. 그러나 아이팟이나 베이크라이트로 된 1세대 다이얼식 전화기가 그랬듯이, 그 각각은 새로운 범주를 성공적으로 만들어낼 정도로 충분히 독특한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6.

영국 디자이너 재스퍼 모리슨과 도쿄의 후카사와 나오토는 이러한 전략을 바탕으로 한 디자인 접근법을 발전시켰다. 즉 특정한 물건들을 직접적으로 모방하는 게 아니라 원형들을 다시 검토하여 정제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후카사와는 계산기를 다시 이끌어냈다. 모든 휴대전화와 컴퓨터, 그리고 상당수의 손목시계들에서 그 기능을 쉽게 충족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이제 계산기는 거의 쓸모 없는 것이 되어버린 물건이다. 핵심적인 사무기기였던 것이 거의 모든 전자기기에 기본으로 깔려 있는 일반적인 기능으로 전락한 것이다. 그러나 후카사와는 그 요소들을 재설정해서 여전히 본질적으로 유용한 도구를 재창조해냈다. 기능적 측면에서 타협하기보다는 계산기의 최적의 형태로 돌아가 세부를 다시 손봄으로써 무언가 가치 있는 물건이라는 느낌을 되살려낸 것이다. 또한 소형화하느라 편리한 사용감을 희생시키는 대신 적당한 크기로 되돌려놓았다.

이 모든 이야기는 원형들만이 중요하다는 말이 아니다. 원형들의 기능적 속성들은 여전히 유동적이므로, 앞으로도 원형이 만들어질 여지가 있는 여러 다른 물건들의 범주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휴대전화가 그렇게 복잡하면서도 흥미로운 형식인 이유는 바로 끊임없이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변신하고 잡다할 정도로 갖가지 기능들을 추가하기 때문이다.


7.

취향에 대한 이케아의 접근법은 훨씬 더 근엄하다. 콘란은 적어도 결정은 우리 몫으로 남겨두었다. 이케아는 진출해 있는 모든 나라에서 자신들이 시험을 통해 확립한 틀에서 1밀리미터도 물러서지 않는 전략을 취한다. 이케아 제품들은 모조리 스칸디나비아식 이름을 갖고 있고, 이케아 카페에서는 스웨덴식 미트볼을 제공한다. 고객의 취향이 아니라 이케아의 취향이다. 영국에서 이케아는 영국식 취향ㅇ에 자신들의 생산 라인을 맞춘 것이 아니라 꽃무늬 원단을 좋아한다고 알려진 영국인들의 기호를 바꿔놓기 위해 공격적인 광고를 실시했다. 그리고 ‘오는 사람 안 막고 가는 사람 안 붙잡는다’라는 공격적인 저가 항공사들의 고객 관리 기법을 소매업에 적용했다.


8.

마크 뉴슨의 서프 제작소와 호주인다운 화사한 감수성이 1980년대 록히드 라운지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그것이 디자인의 역사에 모종의 이정표로 확립된 것은 리트벨트나 미스 반데어로에가 벌어들인 액수를 한참이나 웃도는 거의 1백만 달러에 가까운 경매가로 팔렸다는 사실이 알려진 후였다. 그 가격은 다른 요소들 못지않게 경매 회사의 시장 조성 능력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9.

디자인은 처음 별개의 직업으로 등장한 이후 줄곧 욕망을 조장하는데 쓰였다. 그 요점은 제작에서 형태를 만드는 일을 분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크 뉴슨이나 론 아라드의 작품들이 미술 갤러리에 등장하면서 일종의 위반 방지선을 이미 넘어선 셈이다.

디자인의 이념은 문제 해결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이제 우리에게는 물건에 대한 전혀 다른 범주가 제시되고 있다. 그 범주가 짧은 기간 안에 예술과 디자인이 사회적 위계에서 차지하는 상대적인 위치들을 뒤바꿔놓는 일에 큰 역할을 할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오래 못 갈지도 모르는, 이색적인 새로운 작업들의 폭발적 출현에 연료를 제공해주는 일은 분명히 해낼 것이다.


데얀 수직 지음

정지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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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흔히 명품을 볼 때 독창적이고 고급스러운 아이디어와 스타일에만 감탄하면 그건 비전문가다. 전문가라면 그런 아이디어를 실제 물건으로 생산 '가능케' 했다는 점에 혀를 내두를 것이다. 그것도 전시용 프로토타입이 아니라 '대량생산품'이라는 점에 더욱 놀랄 것이다. 한국도 기발한 아이디어에서는 뒤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국제 콘셉트 디자인 공모전에서 한국 학생들이 늘 대거 수상하곤 한다. 그러나 산업 현장에서는 어떤가? 맥을 못 춘다. 왜 그럴까? 다시 한 번 강조하면, 전시장이 아니라 현실 속의 디자인은 디자이너만의 실력으로 구현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 디자인은 기업 경영자와 소비자의 안목은 물론, 기업의 자본력, 조사능력, 기획력, 기술력, 생산력, 마케팅 능력, 유통 능력, 영업 능력 등과 정확히 일치한다. 기술력이나 유통, 마케팅 능력은 떨어지는데 디자인은 좋은 예는 사실 별로 많지 않다. 그리고 디자인만 뛰어나면 대개 일찍 망한다. 디자이너나 나처럼 디자인업계에서 밥 벌어 먹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슬픈 일이지만, 그게 냉정한 현실이다. 결국 뛰어난 디자인은 뛰어난 인프라와 시스템의 '부산물'인 것이다.

2.
<똥파리>의 양익준 감독 인터뷰 기사에서 본, 대만의 허우샤오셴 감독의 말이 기억난다. 양 감독은 그 말에서 큰 가르침을 얻었다고 했다. "생각하는 것은 물 위에 글을 쓰는 것이고 영화를 만드는 것은 돌 위에 새기는 것이다."

3.
브랜드라는 것은 사람들 머릿속에 각인된 어떤 이미지이고 문화다. 그런 이미지와 문화는 기업이 히트 상품 몇 개 냈다고 단숨에 생기는 게 아니다. 브랜드를 키우려면 숲을 키우겠다는 마음 자세가 필요하다. 그 마음 자세는 당장 히트를 쳐서 한몫에 돈을 긁어모으겠다는 생각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참고 또 참아서 하찮아 보이는 나무 한 그루가 숲이 되는 것을 보겠다는 생각이다. 그 마음 자세는 작은 성과들이 모이고 모이게 해서 어느 순간 어마어마하게 축적된 가치를 만들어 낸다. 그러다 보면 덤으로 얻는 것이 히트 상품이다.

4.
매년 3만 명이 넘는 디자이너를 배출한다고 떠드는 우리나라에서 왜 시장 물건은 여전히 디자인이 이토록 낙후되어 있을까? 물론 디자인 선진국이라고 모든 상품들이 다 빼어나게 디자인된 건 아니다. 그들 나라에도 질 낮은 디자인이 없을 리 없다. 단 우리나라처럼 이렇게 그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 다르다. 우수한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물건과 시장에서 가장 흔하게 팔리는 물건의 격차가 좁을수록 디자인 선진국이 아닐까.

5.
미국의 저명한 진화생물학자인 스티븐 제이 굴드는 '단속평형'이라는 독특한 진화론을 주장한 학자다. 단속평형설의 핵심은 진화가 점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느 순간 커다란 변이가 일어나 진화가 이루어지고, 그 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된다는 것.

6.
바둑에는 이런 격언이 있다. "묘수 두면 진다." 기발한 착상으로 멋진 수를 두면 오히려 진다는 것이다. 그 뜻은 정수를 꾸준하게 두면 한 번에 전세를 뒤집는 묘수를 굳이 둘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묘수를 두었다는 것은 그런게 필요할 정도로 상황이 나빠졌다는 거고, 그건 전에 정수를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국이 낳은 위대한 기사 이창호는 이렇게 말한다. "한 건에 맛을 들이면 암수(暗手)의 유혹에 쉽게 빠져들게 된다. 정수(正手)가 오히려 따분해질 수 있다. 바둑은 줄기차게 이기지 않으면 우승할 수 없고 줄기차게 이기려면 괴롭지만 정수가 최선이다."
스포츠나 전쟁에서의 승리, 기업의 성장, 과학과 기술의 위대한 발명, 디자인이나 예술의 걸작은 모두 '한 번의', '결정적인', '기발한', '빛나는', '천재적인' 같은 수식이 붙은 행위나 생각의 산물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화려하지 않지만 정도를 벗어나지 않는 꾸준한 노력의 총합이 만든 결과다.
최근 우리나라는, 아니 세계는 대박, 인생역전, 베스트셀러, 한 명의 뛰어난 인재가 수만 명을 먹여 살린다, 승자독식과 같은 가치를 전파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이런 가치관은 정도를 걷는 노력, 평범하지만 꾸준한 노력을 낮게 평가한다. 또 허풍, 한탕주의, 화려한 전시 행정과 같은 행위를 추구하도록 만든다.


고마워, 디자인
김신 디자인 잡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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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트닷컴woot.com은 하루에 한 가지 물품만 판매함으로써 완전히 극단으로 갔다. 이것은 품목 취급의 극단적인 방식으로, 고객의 흥미를 유발하여 입소문을 퍼뜨리게 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다. 그날의 유일한 상품이라니, 이보다 더 훌륭하고도 돈이 안 드는 아이디어가 어디 있을까. 우트닷컴의 두 번째 현명한 행동은 RSS를 지원한다는 것이다. 즉 당신은 그들의 사이트에 매일 가 볼 필요가 없다. RSS에 등록만 해두면 되니까. 난 정말 구독 기반 사업이 좋다.

2.
어디에서나 와이파이를 사용할 수 있다면,
인터넷 속도가 10배, 또는 100배 빨라진다면,
모든 사람이 디지털 카메라를 가지고 있다면,
모든 사람이 작고 값싼 노트북을 들고 다닌다면,
매일 쏟아져 나오는 신제품 수가 지금의 다섯 배로 늘어난다면,
월마트의 매출이 세 배로 오른다면,
출시된 지 5년이 지난 제품은 무조건 반값에 판매된다면,
정년이 지금보다 5년 더 높아진다면,

당신은 어쩔 것인가?

3.
주식 시장은 군중 심리를 이용한 엄청난 사기극으로, 그것은 당신이 방금 산 주식을 당신보다 더 비싼 값에 되사 갈 바보가 항상 존재한다는 가설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 사기극의 핵심은, 대기업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성장하고 발전할 것이라는 생각을 투자자들이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물론, 예전에는 이런 가정이 옳았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이 혼란스러운 세상에서는 그것이 틀렸음이 매일같이 입증되고 있다.

4.
나는 결국 네 명의 인턴사원을 뽑았다. 그 중에는 12개국어를 하는 사람도 있다. 내가 그 사람을 고용한 이유는 그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하는 일에 타갈로그 어(필리핀의 지역 언어)는 필요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것은 일종의 공짜 선물이었다. 그건 그에게 흥미를 갖게 만든, 그를 고용하는 것이 기분 좋게 느껴지도록 만든 여러 요소 중 하나다. 당신의 공짜 선물은 무엇인가?

5.
사람들은 브랜드명을 당신 회사의 속성과 결부시킨다. 그러므로 브랜드명은 당신 회사가 속한 분야와 관련이 적을수록 좋다. 만일 회사에 국제 우편 컨설팅이라는 이름을 붙인다면 거기에는 다른 속성을 결부시킬 여지가 극히 적어진다. 내 마음에 드는 이름? 스타벅스, 나이키, 애플.

6.
얼마 전 비스티보이즈(Beastie Boys. 힙합 밴드)는 팬들에게 비디오카메라 50대를 주고 자신들의 콘서트를 촬영하게 했다. 그리고 그 필름은 한 편의 영화로 제작되었다. 이러한 행동의 기저에 깔린 아이디어는 하나다. 사람들이 손쉽게 사진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동시 다발적인 대규모 정보 유포가 발생하도록 만들고, 그럼으로써 혼자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방식으로 입소문을 퍼뜨리는 것이다.

7.
지난주에 내가 만난 한 여성은 자기와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을 명함에 자그마치 일곱 가지나 적어 놓았다.

8.
- 오늘 저녁 식사로 이제껏 한 번도 먹어 본 적 없는 음식을 먹는다. 그리고 내일 저녁에는 또 다른 음식을 시도해 본다.
- 내일 출근길에는 평소에 싫어했거나 생소한 장르의 CD를 듣는다.
- 매주 새로운 잡지를 한 권씩 읽는다.
- 일주일에 한 번, 당신의 전문 분야와 무관한 사람들을 만난다. 그리고 여태껏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는 주제의 박람회에 간다.

9.
마케팅이란 사람들의 '필요'가 아니라 그들이 '원하는 것'을 충족시켜 주는 일이다.

세스고딘 저

안진환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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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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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포렌직컨설팅 솔루션사 사장인 쿠차박사는 첨단기술의 발달로 자신이 하나가 아닌 여러 명이 되고, 현실에서 사는 나 자신, 가상현실에서 사는 여러 명의 ‘나’가 있으며, 이들은 서로 아주 다른 정체성을 가진다고 보았다. 미래사회에는 한 사람이 여러 개의 디지털 아이디를 소유하는 문제로 다양한 소송이 급증한다고 보았다. 현실 속에서는 직장 책상 앞에서 있으면서 가상현실 속에 있는 하나의 ‘나’가 범죄를 저질렀을 때 누가 범죄를 저지른 나인지 구분하기가 힘들어진다는 것이다.

2.
호주나 영국에는 키 큰 양귀비 신드롬이 있다. 남보다 빨리 자라는, 즉 빨리 출세하는 사람들은 정원사가 정원 가꿀 때 키 큰 나무 목을 댕강 치듯이 빨리 사망할 수 있다는 경고다.

3.
단 6명의 정규 직원만으로 운영하고 있는 백과사전 위키피디아 사이트는 집단지성의 가장 성공적인 예다. 세계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방문하는 15개 웹사이트 중 하나인 위키피디아는 인쇄 형태의 사전들과는 달리 누구나 언제든지 이 사이트에 들어와 내용을 수정하고 추가할 수 있게 한 새로운 형태의 백과사전이다.

박영숙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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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른 경쟁사들이 새로운 기술을 따라 잡게 되면 결국 기능이 중요한 차별화 요소가 된다. 더 많은 기능을 넣을수록 제품의 포장을 더 화려하게 만들 수 있다. 1980년과 1990년대에 들어서 VCR은 VCR 플러스, 화면 메뉴, 다양한 플레이백 속도, 어린이 보호 잠금 기능, 조그 휠, 21일 타이머, 한 프레임씩 녹화할 수 있는 기능 등이 덧붙여져서 출시 되었다. 잡스가 말한 것과 같다. “문제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되어서야 그게 정말로 복잡하다는 걸 알게 되고 이를 풀기 위해 모든 해결책을 뒤죽박죽 꺼내 들지요. 이것은 일종의 중간 지점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거기서 포기하고는 합니다.” 형편없이 디자인된 소비자 전자 제품에 항상 12:00가 깜박거리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VCR에 어떤 기능이 있든지 간에 빌려온 테이프를 재생하는 용도로만 사용했다.

2.
데보라(Debora Adler)는 할머니가 실수로 할아버지의 약을 복용한 이야기를 듣다가 이러한 일이 일상 생활에서 흔히 일어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약병은 곡선으로 휘어지기 때문에 그 표면에 쓰인 라벨 글씨는 읽기 힘들다. 게다가 병원에서 처방전을 받은 후, 같은 약국에서 사온 약병들은 모두 똑같아 보인다. 데보라는 리서치 결과를 통해서 처방전을 받은 사람들의 60퍼센트가 그녀의 할머니와 같은 실수를 저지른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데보라가 쓴 논문 SafeRX는 약병, 약병에 쓰인 서체, 시각적 우선순위, 컬러 코드에 대한 개념을 재고하여 약병 디자인을 개선시키는 프로젝트로 발전하였다.그녀는 졸업 후에 타겟(Target)에서 공업 디자이너들과 함께 일하면서 논문 SafeRX의 초기 콘셉트를 ClearRX로 변형시켰다.

3.
“나는 이렇게 야단법석을 떠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컬러 모니터를 빌려왔다. 그리고 곧 처음 생각한 것이 옳다는 것을 확신했다. 컬러가 추가되었다고 해서 일상 작업을 하는데 추가적인 가치가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는 컬러 모니터를 포기할 수 없었다. 이성은 컬러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지만, 감성은 컬러가 중요하다고 속삭이고 있었다.” 돈 노먼(Don Norman)

4.
킴벌리 클락(Kimberly-Clark)은 가정 방문 리서치 후, 휴기스 제품 두 가지를 다시 디자인하게 되었다. 리서치 연구원들은 어머니들이 아기에게 기저귀를 채우고 목욕을 시키는 동안 아기를 붙잡고 있기 위해 안간 힘을 쓰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는 부모들이 어떤 일을 하는 동안 한 손으로는 아기를 안전하게 붙들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이러한 깨달음으로 인해 휴기스 베이비 와이프 트래블 팩과 휴기스 베이비 워시는 한 손으로 조절할 수 있는 제품으로 다시 만들어졌다. 고객들이 제품을 사용하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렇게 디자인할 수 없었을 것이다.

5.
애플의 천재성은 뛰어난 디자인이나 인터페이스를 만든 것이 아니라, 이러한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 미디어 소비자를 지원하는 전체적인 시스템을 계획한 데에 있다. 이 시스템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미디어를 획득하고, 미디어를 관리하고, 미디어를 듣거나 보는 것이다. 아이팟은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기능, 즉 ‘미디어 재생’을 전달하는 데에만 주안점을 두었다. 애플은 아이팟을 쓰는 모든 사용자들이 컴퓨터를 가지고 있다고 가정했기 때문에, 다른 모든 기능은 ‘아이튠즈(iTunes)’ 소프트웨어에 넣었다. 아이튠즈가 있기 때문에 아이팟은 단순하고 우아한 디바이스가 될 수 있었다.

6.
가장 중요한 것은 한 가지 요소가 고객 니즈보다 다소 떨어진다 할지라도, 전체적인 경험 측면에서는 다른 요소들에 의해 상호 보완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7.
애플도 매장을 만들 때 이와 유사한 방식을 따랐다. 스티브 잡스는 공간 경험에 대해서 일화를 들려준다. “우리는 창고를 빌려서 매장의 프로토타입을 지었다. 알다시피 디자인 최종 결과물은 처음부터 단번에 나올 수 없다. 초기 디자인이 효과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밝혀내기 위해서 20여 개의 프로토타입을 지어야 했다.”

8.
이 약병이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시스템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이야기는 훨씬 더 흥미로워진다. 타겟은 이병에 ClearRX라는 고유 이름을 붙여서 ‘처방전 분배와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으로 그 개념을 확대했다. 앞에서 약병 디자인이 잘 동작하게 만들려면 보이지 않는 뒤에서도 상당한 작업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약병 디자인만 놓고 보면 지극히 간단한 콘셉트이다. 약병 뚜껑의 고리를 컬러로 구분시켜서 사람들이 어떤 것이 자신의 약병인지 확인하고, 실수로 다른 사람의 약을 먹는 것을 방지한다. 하지만 실제로 이 간단한 콘셉트를 구현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우선 처방에 따라 약병에 올바른 색깔의 고리가 들어갔는지 확인하고, 제약 IT 시스템으로 가족들 중 누가 어떤 색깔의 고리를 가지고 있는지 추적하고, 다음 처방전을 조제할 때 이 색이 바뀌지 않도록 해야 한다.
약병 하나를 둘러싸고 프로세스와 시스템에 상당한 노력이 들어간다. 애들러가 말하는 것처럼 전체 시스템에 상당한 노력이 들어간다. 애들러가 말하는 것처럼 전체 시스템은 거대한 공동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엄청난 사업이다.

9.
몇 년 전만해도 ‘인터넷 가전’은 많은 회사에서 훌륭하다고 생각한 아이디어였다. 인텔, 컴팩, 게이트웨이, 마이크로소프트, 쓰리콤3Com 모두가 인터넷 가전 제품을 시도했다. 쓰리콤은 우아하게 디자인된 부엌용 인터랙티브 도구인 오드리(Audrey)를 만들었다. 하지만 아무도 499달러가 넘는 돈을 주고 굳이 부엌에서 캘린더, 주소록, 웹 사이트를 써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10.
아이디어에서 어떤 점이 좋은지, 그것을 다음 아이디어에서 어떻게 구현할 지를 판단할 수가 없는 것이다. 초기에 실패를 여러 번 반복해야만 훌륭한 아이디어에 이를 수 있다. 넷플릭스는 수백만 명의 고객들을 대상으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이트를 지속적으로 개선하는 데 있어서 ‘빠른 실패(fail fast)’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넷플릭스의 디자인 팀장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어떠한 것도 추론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테스트를 해보지 않고 추측만 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예측은 사람의 사고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작업을 진행하는 동안 계속해서 실제로 만들어 봅니다. 효과적인 것은 유지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버려가면서 말이죠. 그렇게 하다보면 처음에 했던 생각의 90퍼센트가 효과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11.
현대 비즈니스 관리의 창시자인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는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미래를 예측하는 최상의 방법은 바로 미래를 창조하는 것이다.”

12.
이제는 많은 회사와 리서치 부서도 자신들의 팹랩(Fabrication Laboratory)이나 장비에 투자를 하여 보다 훌륭한 프로토타입 능력을 획득하고 있다. 또한 팹랩에 대한 교육이 늘어나고 있다. 그 결과 앞으로는 빠른 프로토타입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환경에서 자란 엔지니어들과 디자이너들의 세대가 열릴 것이다. 물리적인 프로토타입을 빠르고 쉽게 만들어내는 능력은 제품 개발의 미래에 있어서 엄청나게 중요하다.

13.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노하우와 지식을 공유할 때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아이디어를 말할 때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아이디어를 표현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을 테스트하고 개선하도록 다른 사람들을 초대하는 것이다. 이러한 아이디어가 여러분이 디자인하고 있는 훌륭한 경험을 제공하는 제품과 서비스의 작업을 개선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또 반대로 여러분이 그러한 방식으로 배운 것을 우리에게 나누어주기를 희망한다.

Adaptive path
김소영 역

,
1.
<나는 언젠가 유명한 북극 탐험가 페터 프로이헨의 책을 읽은 적이 있다.> 팬쇼는 그렇게 적고 있다. <북부 그린란드에서 눈보라에 갇혔던 일을 묘사한 이야기다. 그는 혼자뿐인데다 보급품도 떨어져 가는 중이어서 이글루를 짓고 폭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렇게 여러 날이 지났다. 무엇보다도 늑대들의 공격을 받게 될까 두려워서 –굶주린 늑대들이 그의 이글루 지붕에서 먹이를 찾아 헤매는 소리가 들렸으므로- 그는 이따금씩 밖으로 나가 늑대들을 쫓을 셈으로 목청껏 노래를 부르곤 했다. 그러나 바람이 너무 심해서 아무리 큰 소리로 노래를 불러도 그의 귀에 들리는 것은 바람 소리뿐이었다. 물론 그것도 심각한 문제이기는 했지만, 그보다 훨씬 더 큰 문제는 이글루 자체에서 생겨났다. 프로이헨은 자기가 들어앉아 있는 조그만 피신처의 벽이 점점 더 좁혀 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바깥의 특수한 기후 조건 때문에 그가 내뿜는 숨이 그대로 이글루 벽에 얼어붙은 탓으로, 매번 숨을 내쉴 때마다 벽은 점점 더 두꺼워지고 이글루는 그만큼 더 좁아져서 마침내 그의 몸이 들어갈 자리 말고는 공간이 거의 남지 않았다. 자기가 내쉬는 숨이 자신을 집어넣을 얼음 관이 된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무서운 일임에 틀림없다.>

Paul Auster
황보석 옮김
,
1.
이 책은 또한 특허와 저작권이라는 개념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시각에서 씌어졌다. 내가 만일 장애아동들이 운동 치료를 할 수 있는 장난감을 디자인한 후에 특허 신청을 통과하기 위하여 1년 반 동안 그 디자인 출시가 연기된다면 나는 그것을 타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아이디어란 풍부하고도 저렴한 것이며 다른 사람들의 필요로부터 돈을 버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2.
서른 개의 바큇살이 바퀴통에 모여 있으나,
바퀴통 복판이 비어 있음으로 쓸모가 있다.
찰흙을 이겨 그릇을 만드나,
그 한가운데가 비어 있어 쓸모가 있다.
문과 창을 만들어 방을 만드나,
안이 비어 있기 때문에 방으로 쓸모가 있다.
그러므로 모양이 있는 것이 쓸모가 있는 것은,
모양이 없는 것이 그 뒷받침을 하기 때문이다.
-노자[도덕경11장]

3.
핀란드와 스웨덴 출신의 초기 이주자들이 현재의 델라웨어 지방에 그들의 정착지를 세우기로 했을 때, 그들이 가진 것들은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나무와 도끼였다. 재료는 둥근 나무줄기, 도구는 도끼, 그리고 작업과정은 단순히 ‘도끼로 찍어’ 통나무를 만드는 일이었다. 도구와 재료와 작업과정의 이러한 자연스러운 결합은 통나무 오두막집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4.
새로운 장비가 도입되었을 때의 결과는 결코 예측할 수가 없다. 자동차의 경우에서 아이러니를 엿볼 수 있다. 자동차에 대한 초기의 비난가운데 하나는 자동차는 ‘늙은 말’과 달리 운전자가 저녁 한때 약간의 술만 마셔도 스스로 집을 찾아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자동차의 대중화가 미국인들에게 바퀴 위의 침실, 성교를 할 수 있는 새로운 장소를 제공하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했다. 그 누구도 자동차가 현대인의 이동성을 촉진시켜 도시가 급격히 팽창함에 따라 도시 주변이 무질서해지고 무계획적으로 확산되며[스프롤sprawl 현상] 교외 주거지가 대도시를 침식하리라고 생각지도 못했다. 또한 해마다 5만 명의 생명이 사고로 희생되었으며, 우리를 야만적으로 만들었고, 다음과 같은 것들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필릴 와일리Philip Wylie가 말했던 것처럼 “미국 곳곳에서 턱이 찟겨져 나간 어린이를 보게” 하였으며, 우리의 사회 집단을 해체시켜 우리가 소외되게 만들었고, 동시에 16세에서 60세에 이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다달이 150달러의 부채를 지웠다. 1940년대 중반에는 그 누구도 자동차의 첫 번째 기능이 해결되고, 자동차의 일회용 크롬으로 도금된 코드피스codpiece[15~16세기의 유럽에서 유행했던 남성들의 바지 앞에 달려 있는 샅주머니]처럼 사회적 신분의 상징물로 부상하게 되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곧 더 커다란 두 가지 아이러니가 뒤따르게 되었다. 1960년대 초반, 사람들이 비행기를 더 많이 이용하게 되고 그들의 목적지까지 렌터카를 이용하게 되었을 때, 사업가의 고객들은 더 이상 사업가의 차를 봄으로써 그의 생활수준을 판단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디트로이트의 바로크식 허영은 대부분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자동차는 다시 교통수단이라는 원래의 기능에 더 가깝게 되었다.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기 위한 지출은 이제 보트나 컬러 TV 등 다른 것에 쓰이게 되었다.

5.
다다미가 깔리니 마루는 일본 주택의 전반적인 디자인 시스템의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연약하고 매끄러운 종이 벽과 다다미는 악기의 디자인과 발달에 영향을 주었고 또 나아가 일본인의 언어, 시, 연극의 멜로디 구조에까지 영향을 끼친 명백하고 중요한 음향적 특성을 일본의 주택에 부여했다. 울림이 있게 방음된 서구식 가정과 음악회 홀을 위해 디자인된 피아노는 일본 가정에서는 라흐마니노프 협주곡의 경쾌한 음향을 귀에 거슬리는 날카로운 소리로 만들 위험이 있다. 마찬가지로, 일본 사미센의 섬세한 음조는 미국 주택의 반향식 벽에서는 완벽하게 즐길 수가 없다. 이국적 취향을 위해 자신들의 생활 경험에다 일본식 인테리어를 접목시키려는 미국인들은 이러한 것들에서 디자인의 목적 지향적 요소를 제거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6.
군나르 오고르 안데르센Gunnar Aagaard Anderson의 <안락의자Armchair>(1964). 우레탄 폼, 높이 30인치. 덴마크 폴리에테르 인다스트리Dansk Polyether Industri 제작. 뉴욕 현대미술관 소장. 디자이너 기증. 의자 모양은 흉하지만 믿기 어려울 만큼 안락하며 생물형태학적으로 ‘성장’한다.

7.
1958년 각기 국적이 다른 세 명의 디자이너들로 결성된 팀이 신생국가들을 위해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훌륭한 디자인을 개발하였고, 이 디자인은 거의 30년 이후까지도 여러 개발도상국에서 쓰이고 있다. 그것은 벽돌을 만드는 기계이다. 이 간단한 기계는 다음과 같이 사용할 수 있다. 진흙이나 흙을 벽돌 모양 그릇에 담고 커다란 지렛대를 당겨 누르면 완벽한 ‘굳힌 흙’ 벽돌이 찍혀 나온다. 이 장치는 사람들이 하루에 50만 장 또는 일주일에 2장 등 그들 나름의 속도로 벽돌을 제조할 수 있게 한다. 남미와 다른 제3세계 국가들에서는 이런 벽돌들로 학교, 주택, 병원들을 지었다. 오늘날 에콰도르, 베네수엘라, 가나, 나이지리아, 탄자니아와 다른 세계 곳곳에서 학교와 병원, 마을 전체가 세워지고 있다. 이러한 발상은 중요한 것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학교가 존재하지 않았던 곳에 학교 교육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 벽돌 기계로 인해 과거에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곳에 공장을 세우고 시설을 설치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세계 인류의 필요에 부응하는, 사회적인 의식을 지니고 있는 디자인이다.

8.
특정한 상황에서는 폐물화의 개념이 건전한 것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일회용 병원 주사기는 돈이 많이 드는 고압살균기를 비롯한 다른 소독 장비를 필요 없게 한다. 개발도상국이나 기후 환경 문제로 소독이 어렵거나 불가능한 곳에서는 일회용 수술 도구와 치과 기구들이 매우 쓸모가 있다.

9.
창의적인 행위란 이전에는 연관되어있지 않던 구조들을 조합하여 자신이 투입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불시에 얻어내는 것이다.

10.
1920년대에 헨리 포드Henry Ford는 생산 방식을 표준화하여 자동차 가격을 인하하려는 시도를 했는데, 그는 거듭해서 말하기를, “그들은(소비자들) 그들이 원하는 색깔이 검정색이기만 한다면 원하는 어떤 색깔도 가질 수 있다”라고 했다. 색깔 선택권을 박탈함으로써, 자동차 한 대의 가격은 심지어 95달러까지 내려갔으나, 소비자들은 검은색이 원하는 색깔이라는 것을 억지로 받아들여야만 했다.

11.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레이먼드 로위는 소음을 완전히 없앤 작은 가정용 선풍기를 디자인하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소비자들의 요구는 새로운 기어를 선풍기 안에 집어넣어 소음을 줄이지 말라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평범한 미국인들은 소음을 시원하게 하는 작용과 연관지어, 완전히 소음 없는 선풍기란 시원한 공기를 제공할 수 없는 것이라고 느꼈던 것이다.

12.
수년전 동남아시아에 저렴한 신형 쟁기가 디자인되어, 제작에 들어갔고 그 일대에 공급되었다. 그 전에는 일반적으로 바위를 내리 눌러 갈라지니 막대기를 이용하여 땅을 갈았다. 그러나 몇 년 뒤에 그 신형 쟁기들이 사용되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졌고 녹슬어 버려지고 있었다. 그 지역 주민들의 종교적인 믿음 가운데 금속은 토양을 아프게 하고 대지를 해치는 물건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쟁기를 나일론과 유사한 플라스틱 합성물로 감싸는 방안을 제시했다. 사람들과 대지 모두 플라스틱 기술에 의해 상하지 않게 하였기 때문에 그 쟁기들은 마침내 그 지역에서 받아들여지고 사용되고 있다.

13.
페인트는 벽에 처음 칠했을 때는 좋아 보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좋지 않아지는 물질이다. 이 문제를 명확히 해보자. 처음 벽에 칠했을 때에는 좋게 보이지 않을지라도 자기개선과 자기유지를 해나가는 물질을 찾는 것이 가능할까? 해답은 멀리 있지 않다. (해조류와 균류 사이에서 공생적인 성장 관계를 유지하는) 이끼는 자연적으로 ‘기분 좋은 장식 색채’이다(밝은 오렌지, 보라, 빨강, 엷은 회색, 담녹색 등 118가지의 색깔이 존재한다). 이론적으로 보면 우리는 원하는 색채의 이끼를 선택하고 (그것을 영양분과 함께) 벽에 분사한 뒤에 앉아서 느긋하게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그 벽은 처음에는 분명히 얼룩져 엉망진창으로 보일 것이지만 이끼가 자라면서 점점 그 색이 퍼져 나올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디자이너는 사람들이 이끼로 된 벽을 좋아하는가에 대해서 고려해 보아야 할 것이다.

14.
아디론댁Adirondack에서는 석회석을 주입하여 산성화된 호수를 중화시켰다. 그러나 이것은 곪은 상처에 밴드를 붙이는 것과 같은 미봉책에 지나지 않는다. 스웨덴의 중부에 있는 홀름스요 호수가 심각하게 산성화되었을 때, 그 지역 사람들은 칼슘을 뿌리기 위해서 그 지역에 보조금을 요청했다. 하지만 신규예산 제한이 그것을 막았다. 그때 그 지역의 한 이름없는 영웅이 달걀껍질의 칼슘 함유량이 매우 높다는 사실을 기억해 내었고 그 지역에 있는 큰 제과점이 매달 수 톤의 달걀껍질을 강에 버리게 되었다. 산성비에 희생된 호수는 이제 수중 생물을 위협하는 이산화황을 중화시키는 달걀껍질에 의해 치료되고 있다. 웁살라 대학Uppsala University의 농업과학학과에서는 호수의 상태가 너무 심각하지 않다면 이러한 치료법은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15.
한편 어떤 두 사람은 생태학적 재앙을 되돌릴 수 있는 길의 시작이 될지 모르는 계획을 발전시켜왔다. 인생의 절반 이상을 응용식물유전학을 연구한 존 모리스John Maurice와 제임스 아론슨James Aronson은 멀리 떨어진 곳에 쉽게 이식할 수 있고 빨리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식물을 개발하는 식물원의 네트워크를 만들기로 계획하였다. 몇 년간의 접목과 이식, 연이은 접목, 모든 유전학적 기술을 이용하여 두 식물학자는 ‘이상적인’ 나무 몇 종을 키웠다. 마카다미아macadamia 나무와 망고 나무, 아보카도avocado 나무, 그 밖의 다른 나무들이었다. 식물원에서 자란 이러한 나무들의 무게는 채 2온스가 되지 않았고 보통 나무가 걸리는 시간의 절반만 경과하면 완전히 자랐다. 이는 수천 그루의 나무를 각각 몇 주간 충분한 영양과 물을 공급하는 생명 유지 장치를 포함한 시가담배 크기만한 튜브로 포장하여 운송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아론슨은 말하였다. 다시 말해, 작은 숲 전체가 당나귀 등 위에 실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을 위한 디자인

Victor Papanek
현용순•조재경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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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형태와 기능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가장 능률적인 기능을 발휘하는 제품은 그 형태 또한 뛰어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으며, 반대로 아름다운 형태의 제품은 가장 효율적인 기능을 갖추고 있다. 이러한 기능을 우리는 자연에서 찾아내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다. 자연은 형태와 기능의 가치가 가장 완벽하게 조화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디자인도 마찬가지이다. 디자인에서의 형태와 기능은 둘이 아닌 하나로 추구되어야 한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Frank Lloyd Wright.

2.
모더니즘 건축의 거장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구겐하임미술관, 르 코르뷔지에의 롱샹 교회 등의 작품에서 나타나듯이 그들의 디자인이 변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유기적 모더니즘’이라 불리는 변화의 바람이다. 유기적 모더니즘 디자인은 가느다란 선과 추상적인 덩어리 형태와의 균형, 간결하고, 순수하며, 비대칭적이면서 자유로운 형태를 특징으로 한다.

3.
기술은 예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술은 기술을 필요로 한다. 발터 그로피우스 Walter Gropius.

4.
우리가 찾는 미美. 그것은 억지로 나타낼 수 없다. 그것은 기능을 개량함으로써 자연히 생겨난다. 기능, 이것이 바로 미의 원천이다. 레이먼드 로위 Raymond Loewy.

5.
1964년 도쿄올림픽 포스터는 그래픽디자이너 가메쿠라 유사쿠에게 맡겨졌다. 가메쿠라 유사쿠는 도쿄올림픽 포스터 의뢰를 받고 과거 제작된 올림픽 포스터를 자세히 살펴본 후, 사진을 사용한 포스터가 없음을 발견했다. 그리고 사진을 사용해 포스터를 디자인함으로써 기존 올림픽 포스터와 차별성을 두고자 결심했다.

6.
GK 디자인 기구 디자인관 : 디자인의 ‘de’는 ‘나타내다’라는 의미이며, ‘sign’은 ‘사람들이 잠재적으로 바라고 있는 새로운 것’을 의미하므로, 디자인은 곧 ‘미상식美常識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파악한다. 또한 디자인은 일본어로는 ‘의장意匠’으로 풀이되는데, 意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匠은 ‘장인’을 의미하므로 디자인 회사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어내는 장인 집단’이어야 한다고 결론짓는다. 이것은 디자인의 독창성을 전제하는 것으로, 디자인은 이미테이션이나 물건의 표층만을 조형하는 것이 아니라는 설명이다.

7.
디자이너에는 두 종류가 있다. 헬리콥터형과 자동판매기형이다. 전자는 직접 조사하고 관찰하기 위해 끊임없이 대기 중을 순회한다. 그러나 후자는 누군가 돈을 집어넣기 전까지 가만히 있을 뿐이다. 이때 나오는 제품의 종류는 언제나 한정되어 있으며 오래된 것들이다. 앨런 플레처 Alan Fletcher.

8.
디자이너는 제작물 한 가지만이 아니라 주변 환경과 놓을 장소, 사용할 소비자의 심리까지 생각해서 디자인해야 한다. 키스 브라이트 Keith Bright.

9.
디자인의 역사가 짧은 핀란드가 오늘날 디자인 강국으로 급성장한 데는 이 나라의 자연과 역사가 한몫 거들고 있다. 겨울이 긴 핀란드는 자연스레 조명 기구나 인테리어용품이 발달되었고, 국토의 대부분이 원시림으로 뒤덮여 있어 풍토에 알맞은 가구 공예를 발전시키기에 적합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수공예의 전통이 깊은 민중예술의 나라라는 조건이 밑받침되었다.

10.
언제나 신선하고, 언제나 다르며, 언제나 도전하는 것, 그것이 최상이다. 나의 불리한 점은, 서양의 전통이 없다는 것. 하지만 이것이 바로 내게는 기회이다. 잇세이 미야케 Issey Miyake.

11.
디자이너가 창작에 몰두하는 것은 무슨 목적이 있어서인가. 그것은 그 자체가 인생의 연장이기 때문이며, 그것에서 재미와 보람을 느끼기 때문이다. 창작의 기쁨, 이것은 곧 인생의 기쁨으로 되돌아온다. 재미를 느낄 수 없다면 디자이너로서의 생명력은 짧을 수밖에 없다. 인생을 살다 보면 기쁜 일이나 좋은 일만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괴롭거나 슬픈 일을 비롯해서 황당한 일들도 당하게 된다. 그러나 어렵거나 슬픈 일을 당할 경우라도 이를 즐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인생을 긍정적으로 보는 자세는 창작 에너지의 원천이 된다. 칸 타이킁 Kan Tai-Keung.

12.
어제 그 일을 그러한 방식으로 했다고 해서 오늘의 작업 역시 동일한 방법으로 수행해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바로 그것이 디자이너에게 새로운 기술이 필요한 이유이다. 에이프릴 그레이만 April Greiman.

13.
그는 어떤 학문적이거나 이론적인 바탕에서 출발한 디자이너라기보다는 체험적인 사고와 경험을 통해 발명가적인 상상력을 발전시킨 디자이너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그의 디자인에 대한 접근 방식은 남들과 다른 독특한 데가 있다. 예를 들어 가구를 디자인 할 때 사람들은 보통 스케치를 통해 그 형태 및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반해, 그는 스케치하기 전에 머리 속에 시나리오를 작성한다. 그 발상은 어떤 때는 스티븐 스틸버그의 영화의 한 장면에서, 어떤 때는 친구들과의 대화 속에서 시작된다. 특히 미래형 우주선의 모양을 닮은 <즙을 짜는 도구 Juicy Salif>는 필립 스탁 그만의 상상력이 없었다면 디자인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박암종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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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칸트의 도덕철학을 이해하려면 그가 말하는 자유를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자유를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상태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칸트의 생각은 다르다. 그가 생각하는 자유는 좀더 엄격하고 까다로운 개념이다.
칸트의 논리는 이렇다. 다른 동물처럼 쾌락이나 고통 회피를 추구한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식욕과 욕구의 노예로 행동하는 것이다. 왜 그럴까?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행동은 우리 밖에 주어진 어떤 목적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허기를 달래려고 이 길로 가고, 갈증을 해소하려고 저 길로 간다.
예를 들어 아이스크림을 어떤 맛으로 주문할지 결정한다고 치자. 초콜릿? 바닐라? 아니면 에스프레소와 바삭한 과자를 얹은 아이스크림? 이는 언뜻 선택의 자유를 행사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어떤 맛이 내 기호에 가장 잘 맞는지 파악하는 행위이며, 여기서 내 기호는 애초에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칸트는 기호를 충족하는 행위를 문제 삼지 않는다. 다만 이때 우리는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이미 결정된 내용에 따라 행동할 뿐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바닐라보다 에스프레소와 과자가 들어간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다는 욕구는 내가 선택한 게 아니라 이미 갖고 있는 욕구일 뿐이다.
몇 년 전, 스프라이트 음료는 다음과 같은 광고 문구를 선보였다. “당신의 갈증에 복종하라.” 스프라이트는 광고에 (물론 우연이지만) 칸트의 통찰력을 담았다. 내가 스프라이트 캔 하나를 집어들 때면, 자유가 아니라 복종을 실천하는 셈이다. 그것은 내가 선택하지 않은 욕구에 반응하고, 내 갈증에 복종하는 행위다.

2.
칸트가 말하는 자율적 행동의 의미를 이해하는 한 가지 방법은 그 반대 개념과 대조하는 것이다. 칸트는 ‘타율’이라는 말을 만들어 이를 포착했다. 내가 타율적으로 행동한다면, 내 밖에 주어진 결정에 따라 행동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설명해보자. 당구공을 손에서 놓으면, 공은 땅에 떨어진다. 이것은 공의 자유로운 행위가 아니다. 공의 움직임은 자연법칙, 그러니까 중력의 법칙에 지배받는다.
이번에는 내가 다른 사람 머리 위로 떨어져 그 사람이 죽었다고 가정해보자. 나는 그 불행한 죽음에 도덕적 책임이 없을 것이다. 당구공이 높은 곳에서 누군가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고 해서 당구공에게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두 가지 경우에 떨어지는 물체, 즉 나와 당구공은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둘 다 중력의 법칙에 지배받는다. 여기에는 자율이 작용하지 않았기에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여기서 자율로서의 자유와 칸트가 말하는 도덕의 연관관계를 볼 수 잇다. 자유로운 행동은 주어진 목적에 걸맞은 최선의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를 선택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만이 할 수 있고 당구공은 할 수 없는 선택이다.

3.
고대에는 오늘날보다 목적론적 사고가 더 흔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불이 위로 솟는 이유는 본래의 자리인 하늘에 닿기 위해서고, 돌이 아래로 떨어지는 이유는 원래 속해 있던 땅에 가까워지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자연은 의미 있는 질서에 따라 움직인다고 여기던 시절이었다. 자연을 이해하고 그곳에서 우리 위치를 이해하는 것은 곧 자연의 목적과 본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4.
곰돌이 푸는 나무 발치에 앉아 머리를 발바닥 사이에 두고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푸는 먼저 이렇게 중얼거렷어요. “저 윙윙거리는 소리에는 뭔가 뜻이 있어. 아무 뜻도 없이 저렇게 그냥 윙, 윙 할 리는 없다고. 윙윙 소리가 난다면, 누가 일부러 윙윙 소리를 내는 거야. 윙윙 소리를 내는 이유는 ‘내가’ 알기로 딱 하나, 저기 꿀벌이 있다는 뜻이지.”
푸는 다시 한참 생각하다가 말했어요. “그리고 저기 꿀벌이 있는 이유는 ‘내가’ 알기로 딱 하나, 꿀을 만들기 위해서야.”
그러더니 푸는 일어나서 말했어요. “그리고 꿀을 만드는 이유는 ‘내가’ 알기로 딱 하나, ‘나더러’ 그걸 먹으라는 이야기지.” 푸는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가기 시작했어요.

5.
모든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찬양하는 시민권을 누리지는 못했다. 여성은 자격이 없었고, 노예도 마찬가지였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여성과 노예의 본성은 시민이 되기에 적절치 않다. 지금 생각하면 누가 봐도 부당한 일이다. 그런데 이 부당함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런 주장을 한 뒤로도 2000년 이상 지속되었다. 미국에서도 노예제는 1865년까지 폐지되지 않았고, 여성은 1920년에야 비로소 투표권을 얻었다.

Michael J. Sandel
이창신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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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1물결의 부 창출 시스템이 주로 키우는(growing) 것을, 제2물결이 만드는(making) 것을 기반으로 했다면, 제3물결의 부 창출 시스템은 서비스하는(serving) 것, 생각하는(thinking) 것, 아는(knowing) 것, 경험하는(experiencing) 것을 기반으로 한다.

2.
이들은 보다 유연하고 신축성 있는 조직구조를 초래하는데, 영구적 혹은 장기적인 비즈니스 조직구조에서 일회적이고 단기적인 조직 형태로의 전환이 이루어진다. 임시 점포까지 생겨난다. 예컨대 도쿄에서 회사를 운영하는 디자이너 레이 카와쿠부와 남편 에이드리언 조페는 독일 베를린에 가게를 차렸다.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1년만 영업하다가 수익이 나든 안 나든 그 후에는 문을 닫을 것이다. 이 아이디어는 패션, 영화, 음악, 연예계의 유효기간이 점점 짧아지고 있는 추세를 반영한다.

3.
과학 기술의 획기적인 발전도 양날의 칼이 될 수 있다. 정보와 생명공학의 통합이 추진되면서 기존에 수입하던 원자재와 다른 상품에 대한 필요가 줄어들게 된다. 급속하게 소형화, 맞춤화가 진행되고 원자재의 일부를 지식 콘텐츠가 대체하면서 현재 세계 경제에서 큰 몫을 차지하고 있는 부피가 큰 일용품들이 미래의 경제에서는 필요가 없을 것이다. 나노 크기의 상품들이 생겨나 몇 톤씩 원료를 선적해야 할 필요도 없어질 수 있다.
이렇게 되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여파는 중국의 청도로부터 로스앤젤레스, 로테르담 등 세계 주요 항구도시로 번질 것이다. 이런 현상들은 국내에서 처리할 수 있는 프로세스를 강화하며, 세계화된 시장에 대한 의존도를 떨어뜨린다.

4.
앞으로 수백 개 아니 수십만 개의 위성이 하늘에 띄워질 것이다. 알제리, 파키스타, 나이지리아는 이미 100파운드 정도 무게의 마이크로 위성을 구입했으며, 이는 종래의 위성에 소모되는 비용의 일부분으로도 카메라를 탑재하고 궤도로 이동할 수 있는 성능이다. 이런 위성을 공급하는 영국 서리 새틀라이트 테크놀로지(Surrey Satellite Technology)의 마틴 스위팅(Martin Sweeting) 교수는 10년 내에 신용카드만한 크기의 위성을 발사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크기와 비용이 축소되면서 그것들은 중소기업, NGO, 민간 단체나 개인도 이용할 수 있을 만큼 저렴해질 것이다.

5.
레스크는 결론적으로 모든 정보가 저장되면 학생들이 외우고 기억하지 않아도 될 날이 올 것이라고 말한다. 대신에 외우고 기억해 줄 기계장치를 착용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아주 흥미로운 질문이 떠오른다. 그 장치가 알츠하이머 환자들을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 레스크의 주장이 맞고, 인간이 정보 저장을 위한 내부 메모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장차 인간 두뇌의 어느 부분이 불필요해질 것인가? 그리고 어느 부분이 지식을 위해 계속 필요할까?

6.
남미 토착 식물이던 토마토가 16세기에 처음 유럽에 들어왔을 때는 상식을 가진 지식인들조차 토마토가 인간에게 독이 된다고 생각했다. 스웨덴의 식물학자 린네(Linnaeus)가 토마토의 무해함을 주장하기 200년 전의 일이다. 1820년에 들어서 어떤 용감무쌍한 사람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토마토 2개를 먹는 무모한 행동을 한 뒤에야 린네의 주장이 옳았음이 증명되었다.

7.
프랑스 루이 15세의 정부(情婦)로 유명했던 퐁파두르 부인의 주치의, 프랑소와 케네(Francois Quesnay)는 천재였다. 평민의 아들이었던 케네는 11살까지 글을 읽을 줄 몰랐지만 일단 배우기 시작하자 멈출 줄 몰랐고, 곧 독학으로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습득했다. 그는 잠시 조각공으로 일하다가 의대에 들어가 외과의사가 되었다. 혈관류 전문가가 된 그는 프랑스의 의학계의 최고봉이 되어 루이 14세 궁정에 입성하게 되었다. 케네는 그 후 농업 경제에 관하여 깊이 있는 연구를 했고 서양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그를 소크라테스나 공자와 비교할 정도였다. 그러나 케네는 한 가지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 모든 부의 원천은 농업에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케네는 천재적인 인물이었지만 큰 그림을 보지 못했다.

8.
선 마이크로시스템스(Sun Microsystems)의 수석 과학자 빌 조이(Bill Joy)는 유전학, 로봇공학, 나노공학으로 기술의 파괴적 자기 복제가 가능해지고 그것이 폭주하면 인간을 지배할 수도 있다며 이런 과학 연구를 포기하자고 강력히 요구한다. 2030년쯤이면 컴퓨터가 인간보다 똑똑해져 자체 복제가 가능해지고 나아가 인간을 지배하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9. 미국 식품의약국 잡지에 “현재 기획 구상 중인 의료기구들을 보면 마치 공상과학 작품을 읽고 있는 듯하다. 양치질할 때 혈당과 박테리아 수치를 측정하는 바이오센서 칩이 내장된 칫솔, 사람이나 사물을 기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초소형 화면이 박힌 컴퓨터 안경, 상처 부위 박테리아나 바이러스를 감지하고 항생제 투여 여부나 어떤 치료를 받아야 하는지 알려 주는 스마트 붕대 등을 상상해 보라”는 기사가 실린 적이 있다. 그 잡지에는 에베레스트 산을 오를 때 산악인의 건강 상태를 점검할 수 있는 스마트 티셔츠와 장애인이 눈을 깜빡이거나 생각을 하면 기계를 조작할 수 있는 핸즈 프리 기구에 대해서도 소개하고 있다. <뉴욕 타임스 매거진>은 “자신의 집에서 컴퓨터단층촬영(CAT)을 하고, 변기 물을 내리면 자동으로 소변 검사가 되고, 매끼 식사 후 컴퓨터로 수명 분석이 나온다고 상상해 보라”고 말한다.

10.
프로슈머에게로 일이 전가되는 이런 변화가 확산되는 추세이다. 2002년 1,700만 미국 가정이 인터넷으로 증권거래를 했고, 4,000만 고객이 인터넷으로 여행상품을 예약했다. 미국의 인터넷 쇼핑 건수는 3억 6,000만 건에 이른다. 기업들이 노동비용을 외부로 전가하는 가운데 프로슈머들은 이런 거래를 통해 주식 중개인이 되기도 하고, 여행사 직원, 판매원이 되기도 한다.
빈틈없는 기업들은 노동을 외부로 돌리는 보다 영리한 방법들을 찾아내고 있다. 일본의 도톤보리(Dohton Bori) 레스토랑에서는 자신이 직접 가져다 먹는 단순한 뷔페 스타일을 넘어 고객이 직접 요리를 한다.

11.
디지털 도구로 인해 최소한의 기술만 가지고도 자신만의 영화, 텔레비전 쇼, 앨범, 책, 라디오 방송을 만들 수 있다. 자신만의 엔터테인먼트를 만들어 내는 일이 갑자기 무척 쉽고 저렴한 일이 되었다. 앞으로 이런 디지털 엔터테인먼트는 점점 더 확장될 것이다.

12.
지금은 투박하고 비싸지만 이런 기술(ex. rapid prototyping)을 이용하면 잉크 대신 다양한 가루나 화학물질을 담고 있는 카트리지로 더 작고, 더 값싸고, 더 다양한 모형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이론적으로는 그 누구라도 인터넷에서 사용 설명서를 다운로드하여 데스크톱 팩토리를 만들 수 잇다는 말이다. 3D세스템즈의 머빈 러겔리(Mervyn Rudgley)는 “우리 자녀의 자녀들은 자신의 장난감을 스스로 찍어 내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13.
가격의 맞춤화 경향은 경매에 의해 가격이 결정되는 이베이를 비롯한 여러 온라인 사이트의 엄청난 성공을 통해 재확인되고 있다. 사실 호텔 예약에서 하드웨어, 비니 베이비(Beanie Babies, 개별적 디자인으로 캐릭터의 이름과 생년월일, 메시지 등이 제각기 다른 봉제 동물 인형 시리즈. 한정 디자인, 한정 판매라는 전략 때문에 처음 5달러에 불과했던 인형 가격이 수백 달러까지 높아진 경우도 있었다-역주), 보트, 자동차, 컴퓨터, 의류에 이르기까지 전문화된 경매시장이 확산되고 있는 추세이다. 프라이스라인(priceline)은 브랜드를 따지지 않는 구매자가 원하는 가격을 제시하면 판매자가 이들에게 다가가 이른바 역경매(reverse auction)를 통해 한걸음 더 나아갔으며 다른 형태의 전문화된 가격 결정 방식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14.
“미래의 경제는 좀 다릅니다. 아시다시피 24세기에는 돈이란 것이 없습니다.” 공상과학 영화 <스타트랙8 : 퍼스트 콘택트 Star Trek : First Contact>에 등장하는 우주선 선장 장 뤽 피카드의 말이다. 그때쯤에는 아마 자본주의라는 것도 없을 것이다. 어쩌면 2300년이 되기 훨씬 전에 자본주의가 사라질지도 모를 일이다.
자본주의의 다른 핵심 요소와 마찬가지로 돈도 수세기 만에 가장 빠르고 강력한 혁명을 경험하고 있다. 이 혁명은 지불•결제 형태와 방식을 획기적으로 뒤바꿔 놓고, 돈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비즈니스 기회를 증가시키고 있다.

15.
콸라룸푸르에 있는 아랍 말레이시안 은행은 무슬림 고객들에게 안마 시술소나 나이트클럽에서는 사용할 수 없는 카드를 발급한다. 어쩌면 적극적인 정치적 운동의 영향으로 나이키나 쉘, 갭(The Gap) 등 보이콧 대상 기업의 제품은 절대 구입할 수 없는 보이콧 카드 같은 것이 수백만 장씩 발급될지도 모른다. 혹은 남편이나 아내가 지출이 심한 배우자의 사용 한도를 정할 수 있는 카드나 부모가 자녀에게 사탕, 술, 담배 혹은 패스트푸드를 살 수 없는 카드를 주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패스트푸드의 유혹을 뿌리치기 어려운 비만인들이 일부러 피자헛이나 타코벨(Taco Bell) 등의 패스트푸드 체인점에서는 사용할 수 없는 카드를 이용할 수도 있다. 지출을 아끼기 위해 굳게 마음먹고 1달러 이상의 현금은 가지고 다니지 않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카드도 생길 수 있다.

16.
뉴욕 주 이시카에서 최초로 시작해 이제는 수십 개 지역으로 확산된 대안 화폐 프로그램은 소비자와 상인들이 실제 화폐 대신에 전표를 이용해 임대료에서 의료비용, 극장 입장권에 이르기까지 모든 재화와 서비스를 거래할 수 있게 되었다. 또 다른 시스템은 법률학 교수인 에드거 칸이 창안한 것으로 《타임 달러》에 자세히 소개되었다. 타임 달러란 한 회원이 이웃 노인의 장보는 일을 도와준 경우, 그에 대한 서비스 봉사 점수를 쌓고, 나중에 이 점수를 이용해 다른 회원에게 자신의 아기를 돌봐달라고 부탁할 수 있는 제도이다. 이런 새로운 시도는 프로슈머의 다양한 경제적 기여에 준통화 가치를 부여하고 그 가치를 인정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17.
매년 5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B형 간염으로 사망하고 있다. 이 중 3분의 1이 아시아 사람들이다. B형 간염 보균자도 전 세계적으로 4억 명에 이른다. 한편 미국에서는 3차에 걸친 간염 예방 접종 비용이 200달러에 달하는데 이는 수백만 명의 가난한 농민들에게는 너무나 큰 비용이다.
코넬 대학 연구진은 바나나에 간염 예방 백신을 이식하는 연구를 진행 중이다. 이 연구가 성공하면 1회 복용에 10센트 정도 비용으로 간염을 예방할 수 있다. 머지않아 B형 간염을 예방하는 백신이 함유된 토마토와 감자가 개발될 수도 있으며, 비타민 A를 강화해 빈곤 지역의 어린이들이 많이 걸리는 시력 상실을 예방하는 황금쌀도 나올 수 있다. 인도에서는 콜레라와 공수병을 예방할 수 있는 백신 강화 식품 개발을 위한 연구가 진행 중이다.

18.
프로젝트 수행에 실패해 수백만 달러의 손해를 입힌 한 간부를 해고하겠냐는 질문에 대해 IBM의 전 회장인 토마스 왓슨은 “그를 해고한다고? 맙소사. 안돼. 나는 방금 그의 수업료를 지불했단 말이야”라고 말했다.

By Alvin Toffler and Heidi Toffler
김중웅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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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봐 싱클레어」 그가 천천히 말했다. 「너한테 유쾌하지 않은 말을 하려는 건 아니었어. 아무려나 어떤 목적으로 네가 지금 네 잔을 마시고 있는지, 그것은 우리 둘 다 알 수 없어. 하지만 너의 인생을 결정하는, 네 안에 있는 것은 그걸 벌써 알고 있어. 이걸 알아야 할 것 같아. 우리들 속에는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하고자 하고, 모든 것을 우리들 자신보다 더 잘 해내는 어떤 사람이 있다는 것 말이야. 미안하지만, 난 집에 가봐야겠다」

헤르만 헤세
전영애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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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국은 축구 종주국이지만, 1990년까지 강력한 프로리그가 없어서 독일의 분데스리가, 이탈리아의 세리에A, 스페인의 프리메라리가에 밀려 축구의 주변국 신세가 되고 말았다. 1991년, 영국은 종주국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새로운 리그를 출범시킨다. 이것이 프리미어리그이고, 그들의 전략은 적중하여 이제 프리미어리그에 세계가 열광한다. 세계인들에게 가장 흥분되고, 짜릿짜릿한 시간과 공간을 제공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도대체 그들은 무슨 일을 어떻게 했던 것일까?
첫째, 모든 것을 개방했다.
현재 프리미어리그는 20개 구단 가운데 3분의 1이 외국인 구단주다. 감독은 50%, 선수는 60%가 외국인이다. 대표적인 명문팀 첼시는 개막전 출전 선수 전원을 외국인 선수로 내보낸 적도 있다. 그들도 자국 선수들을 보호하기 위해 얼마든지 외국인 방어장치를 만들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둘째, 엄격하게 평가했다.
영국 프리미어리그는 20개 팀으로 운영되며, 2부 리그인 챔피언십리그는 24개 팀으로 운영된다. 그런데 1, 2부의 넘나듦이 매우 심하다. 매 시즌이 끝나면 1부의 하위 3팀이 2부로 강등되고, 반대로 2부의 1,2위 팀은 1부 리그로 자동 승격된다. 1부 리그의 남은 한 자리는 2부 3~6위 팀의 플레이오프 승자가 차지한다. 간단히 말해 매 시즌마다 3개 팀이 리그를 오르내린다고 생각하면 된다. 떨어지면 안 된다는 절체절명의 목표가 있기 때문에 유럽 축구선수들은 어떤 경쟁에도 몸을 사리지 않는다.

2.
“창의력이란 여러 가지를 연결하는 능력이다.” –스티브 잡스

3.
1991년, 일본의 아오모리 현. 일본 최대의 사과 생산지이기도 한 이 곳에 엄청난 태풍이 몰아쳐서 마을 전체가 쑥대밭이 됐다. 낼모레 수확을 앞둔 사과의 90%가 소실될 정도였다. 마을사람들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하늘을 보며 ‘망했다’고 한탄만 할 뿐, 아무도 손을 써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런데 어떤 농민 한 사람은 비교적 차분했다. “괜찮아.”
‘뭐가 괜찮다는 거냐?’는 시선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그 농민이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겐 아직 떨어지지 않은 10%의 사과가 있잖아.”
“그걸로 어쩌려고?”
“우리가 말이야, 만약 이 떨어지지 않은 사과를 ‘떨어지지 않는’ 사과로 만들어서 팔면 어떨까? 예를 들면 수험생 같은 사람들에게 시험에서 떨어지지 않게 해주는 ‘합격사과’를 만들어 팔면 말이야.”
마을주민들은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원래 사과는 박스 단위로 포장하는데, 아오모리 사람들은 살아남는 사과가 얼마 안 되니까 한 개씩 낱개로 포장했다. 그러고는 모자라는 것은 재미있고 감성적인 문장으로 채웠다.
‘초속 40m의 초(超)초(超)강력 태풍에도 떨어지지 않았던 바로 그 사과! 내 인생에 어떤 시련이 몰아친다 해도 나를 떨어지지 않게 해줄 그 사과, 합격사과.’
이 합격사과는 무려 10배나 비싼 1만 원으로 책정했고 다 팔렸다. 결국 합격사과는 태풍으로 생긴 90%의 손실까지 만회하며 그 해 일본의 대표적인 입소문 히트상품으로 자리매김했다.

4.
남자다운 두부, 오토코마에
이 두부는 이토 신고 사장의 작품이다. 그는 아버지가 하는 두부회사에서 영업사원으로 후계자 수업을 시작했다. 마케팅 책임자로서 그는 특별한 프로모션도 해보고, 독특한 두부도 많이 만들어보았다. 그러나 백약이 무효. 아무리 열심히 만들어도 두부는 영원히 ‘100엔’ 고정이었다. 맛에 승부를 걸고, 영업을 열심히 해도 그것만으로는 소비자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그가 별짓을 다 해보고 고생 끝에 얻은 결론은 ‘결국 두부에도 남다른 세계관을 넣어야 한다.’ 이것이었다.
그는 고민했다. ‘두부의 세상에 도대체 뭘 갖다 붙일 것인가?’ 그러다가 엉뚱하게도 두부와 가장 멀리 있는 존재에 눈길 갔다. 바로 남자다. 그래서 나온 것이 ‘남자다운 두부’다.
“진정한 오토코마에는 당신을 배신하지 않는다.”

5.
삼성 성공의 일등공신은 2006년 출시된 ‘보르도 TV’다. 제품을 개발할 당시, 직사각형 일변도를 탈피해 V자로 파고, 거기에다 받침을 붙여보니까 ‘왠지 와인잔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와인 컨셉을 차용하기로 했다. 또 그냥 우기면 힘이 없으니 프랑스의 유명한 와인 산지 ‘보르도’를 이름으로 붙여서 컨셉을 강화한 다음, 시장에 선보였다. 이처럼 별것도 아닌 시도를 했는데, 세계인이 반응하더라는 것이다. 보르도 TV의 실적은 결코 적당히 우수한 수준이 아니다 최단기간 밀리언셀러에 등극한 데 이어 출시 첫해에 연간 300만대가 팔려나간 대기록을 세웠다. 덕분에 삼성전자는 ‘TV 부문 세계 1위’라는 꿈을 이룰 수 있었다.

6.
나이키에 가면 이렇게 적혀 있다고 한다. “우리가 파는 것은 신발이 아니라 ‘승리(victory)’다.”

7.
세계적인 무용가 마사 그레이엄은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에서 절대 용납할 수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평범이다. 우리가 자기계발을 하지 않아 평범해진다면, 그것은 죄악이다. 사명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은 평범해질 틈이 없다.’

8.
예전에 스타벅스 매장에서 안 쓰는 장난감을 가져오면 커피 한 잔을 무료로 준 적이 있다. 많은 엄마들이 장난감을 싸들고 아이 손을 잡고 버스를 타가면서 스타벅스에 왔다. 그녀들은 왜 그런 번거로운 일을 했을까? 그들은 자신의 작은 수고로 장난감을 가질 수 없는 아이들에게 작은 기쁨을 줄 수 있다는 ‘행복한 마음’때문에 움직인 것이다. 나아가 자신의 아이들에게 이렇게 가르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네가 더 이상 쓰지 않는 장난감을 그냥 썩혀두는 것보다, 친구들과 함께 나눌 수 있다면 훨씬 더 아름다울 거야.”

9.
줄탁동시(啐啄同時)
어미가 품에 안은 알 속에서 조금씩 병아리가 자랐다. 이제 세상 구경을 해야 하는데, 알은 단단하기만 하다. 병아리는 나름대로 공략부위를 정해 쪼기 시작하지만, 힘에 부친다. 이때 귀를 세우고 그 소리를 기다려온 어미닭은 그 부위를 밖에서 함께 쪼아준다. 답답한 알 속에서 사투를 벌이던 병아리는 어미의 도움으로 비로소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다.
이처럼 병아리가 안에서 쪼는 것을 ‘줄(啐)’이라 하고, 밖에서 어미닭이 그 소리를 듣고 화답하는 것을 ‘탁(啄)이라 한다. 그리고 이 두 가지가 동시에 발생해야 일이 완성될 수 있다는 고사성어가 바로 ‘줄탁동시(啐啄同時)’다.

10.
두바이는 사막지대여서 사람들이 바닷가에 모여 사는데, 해안선 길이가 고작 71km밖에 안 됐다. 우리나라는 북한을 제외하고도 2,500km에 달하니 두바이의 상황이 얼마나 열악한지 짐작이 갈 것이다. 그래서 두바이는 간척사업을 하면서 해안선 길이를 획기적으로 늘리기로 하고, 목표를 설정했다. 그 목표는 무려 20배였다. 71km에서 1,500km. 해안선의 길이를 기하급수적으로 늘릴 방법을 찾다가 나온 것이 ‘더 월드’나 ‘팜 아일랜드’같은 요상한 모양의 인공섬 군락이다. 섬의 세계지도나 야자수 이파리 모양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엄청난 목표가 상상력을 불러일으켜서 해안선을 20배 늘려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올 수 있었다.

11.
지구에서 가장 높은 산은? 물론 에베레스트다. 그 높이가 8,848m로, 백두산보다 3배나 더 높다. 이 산에 인류 역사상 최초로 등정한 사람은 뉴질랜드의 에드먼드 힐러리(Edmund Hillary)로, 1953년에 정상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한국인이 처음 등정에 성공한 것은 1977년으로, 고(故) 고상돈 대원이 세계에서 58번째로 족적을 남겼다. 힐러리보다 24년 후에 올랐는데 그 등수가 58등이라면, 매년 2.4명이 에베레스트에 올랐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렇다면 요즘은 1년에 몇 팀이나 에베레스트에 오를까?
2004년 330명, 2006년 480명, 2008년 600명이라는 기록이 마지막이다.
왜 이렇게들 많이들 올라갈까? 그 이유는 베이스캠프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힐러리나 고상돈 대원이 등정을 시도하던 시절에는 베이스캠프 높이가 예외 없이 해발 3,000m 이하였다. 그들은 약 6,000m를 더 올라가야 정상까지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보통 5,200m, 세게 치는 사람은 6,000m 이상에도 베이스캠프를 친다. 남은 거리는 이제 3,000m가 채 되지 않는다. 옛날에 비해 순등정거리가 절반 이하가 된 것이다. 그래서 요즘은 많은 사람들이 에베레스트 정상에 도달하는 것이다.

12.
완행열차 –허영자

급행열차를 놓친 것은 잘된 일이다
조그만 간이역의 늙은 역무원
바람에 흔들리는 노오란 들국화
애틋이 숨어 있는 쓸쓸한 아름다움
하마터면 나 모를 뻔하였지

완행열차를 탄 것은 잘된 일이다
서러운 종착역은 어둠에 젖어
거기 항시 기다리고 있거니
천천히 아주 천천히
누비듯이 혹은 홈질하듯이
서두름 없는 인생의 기쁨
하마터면 나 모를 뻔하였지

13.
세계적인 디자이너 피에르 가르뎅(Pierre Cardin)은 이렇게 말했다.
“난 다른 사람들에게 욕먹는 일에는 이미 이골이 났습니다. 내가 혁신적인 디자인을 선보일 때마다 사람들은 만신창이가 될 때까지 그 디자인을 헐뜯고 비난했죠. 그런데 그렇게 욕하던 사람들도 결국 내가 만든 옷을 입더군요.”


강신장 지음
,
1.
최근 100년간 자동차는 ‘상자형’-‘유선형’-‘쐐기형’-‘생체형’ 순으로 변해왔다. 이러한 디자인의 변천을 볼 때 디자이너들이 자동차를 디자인할 때 ‘보다 빨리’라는 목표를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0세기의 자동차가 남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것은 자동차에 스피드의 마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시점에서도 여전히 자동차의 매력을 스피드라고만 규정할 수 있을까. 일례로 요즘 한창 인기를 끌고 있는 RV차에 대중들이 원하는 것은 쾌적한 공간이다. 메르세데스 벤츠의 콤팩트 카 ‘A클래스’ 또한 상황에 맞춰 임기응변으로 활용할 수 있는 차내 공간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현상을 보면 요즘의 소비자는 자동차에 ‘스피드’가 아닌 ‘스페이스’를 요구하고 있는 듯하다. 전화나 네비게이션은 물론, 인터넷까지 결합하고자 하는 시도를 보면 지금부터는 자동차를 ‘이동 정보 공간’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는 공기저항과의 싸움을 의식한 외관뿐만이 아닌, 내부에서부터 자동차를 디자인한다는 발상의 전환이 요구될 것이다.

2.
생각해보면 트렌치코트는 원래 제1차 세계대전 때 참호용으로 만들어진 군복이었다. 발목까지 끈으로 여미는 ‘데저트 부츠’도 사막의 전쟁에서 탄생했다. 군인이 동경의 대상이었던 시대에는 군복이 패션 아이템으로 대중의 관심을 끌었다. 남자들이 싸우는 장소가 전쟁터에서 스타디움으로 옮겨간 지금, 유행의 흐름이 스포츠에서 시작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최근 몇 년 사이 스포츠 슈즈가 인기를 모으는 것은 그만큼 시대가 평화롭다는 것을 반영하는 현상이기도 하다.

사카이 나오키 지음
정영희 옮김

,
1.
그의 손자이자 원나라 시조인 쿠빌라이칸에 이르러 정복 면적은 훨씬 더 늘어났다. 동쪽으로 고려에서부터 서쪽 헝가리까지, 북쪽 시베리아로부터 남쪽 베트남 근방까지. 쿠빌라이칸은 만주에서 페르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제국을 건설했다. 인류 역사상 첫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출현이다. 당시 몽골 고원 인구는 100만~200만 명이었다. 이 숫자가 중국•이슬람•유럽 사람 1억~2억 명을 정복하고 거느렸다.

2.
매일 아침 아프리카에선 가젤이 눈을 뜬다.
그는 사자보다 더 빨리 달리지 않으면 죽으리라는 것을 안다.

매일 아침 사자 또한 눈을 뜬다.
그 사자는 가장 느리게 달리는 가젤보다 빨리 달리지 않으면
굶어 죽으리라는 것을 안다.

당신이 사자이건 가젤이건 상관없이
아침에 눈을 뜨면 당신은 질주해야 한다.

3.
그 겔에서 잠을 자다 소변이 급해졌다. 하지만 겔 바깥을 사나운 개가 지키고 있어서 꼼짝할 수 없었다. 몹시 난처한 몸짓을 보였더니 주인은 두 뼘도 안 되는 끈 하나를 챙겨 개를 불렀다. 나로선 어리둥절할 수밖에. 정착민의 사고 속에서 개를 묶는 방법은 목에 올가미를 씌워 어느 한 곳에 구속시키는 것쯤이 유일하다. 한데 두 뼘도 안 되는 끈으로 어떻게 개를 붙잡아 둘 수 있을까.
그 유목민은 간단히 해결해 버렸다. 한쪽 앞다리의 무릎을 접더니 끈으로 칭칭 감아 개를 ‘절름발이’로 만들어 놓았다. 세상에, 정착민의 방식이 개의 활동 공간을 제한해 구속하는 것이라면, 유목민의 것은 시간(개의 속도)을 구속해 개의 활동력을 약화시키는 방식이었다.

4.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 근교에는 돌궐제국을 부흥시킨 명장 톤유쿠크의 비문이 있다. 당시 유목민이 겪었던 눈물 겨운 사연들을 구구절절 기록하면서 장군의 유훈을 새겨 놓았다.
“성을 쌓고 사는 자는 반드시 망할 것이며 끈임 없이 이동하는 자만이 살아 남을 것이다.”

5.
흡혈박쥐는 40시간 동안 피를 공급 받지 못하면 죽는다. 그렇게 죽어가는 동료가 곁에 있으면 이들은 자기 피를 토해 나눠 준다. 몽구스는 부모가 외출하면 집에 남아 동생들을 돌본다. 적을 보면 자기는 먹힐지언정 소리를 질러 무리를 대피시키는 땅다람쥐도 있다. 침입자를 쏘고 장렬하게 죽는 벌이나, 무리를 위해 뜨거운 사막을 돌아다니는 여왕개미들의 희생정신은 무리의 생존을 위해, 더 나아가 자기 유전자의 생존을 위해 진화한 본능이다.

6.
앨빈 토플러 ‘제3의 물결’
피터 드러커 ‘글로벌 경제’
레스터 서로우 ‘지식의 지배’
새무얼 헌팅턴 ‘문명의 충돌’

7.
개미에 번호를 붙여 촬영해 보면 100마리 가운데 실제로 열심히 일하는 개미는 15마리에 불과하다는 조사가 있다. 85마리는 일을 하지 않고 허둥대거나, 일하는 걸 지켜보는 일을 한다. 다시 일하는 15마리를 모아 번호를 붙여 두면 역시 그 중에서 15%만이 일한다. 무릇 땅에 근거해 만들어진 조직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잘잘못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조직이라는 것은 만들어지는 순간 그렇게 된다는 얘기다. 조직 생리상 일하는 자와 얹혀 사는 자가 있게 마련인 근대 관료 조직의 특성이 그렇다.

김종래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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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50~1974년 아프리카 잠비아의 인구 통계 자료를 분석한 결과 외할머니와 사는 아이들의 경우 외할머니가 없는 가족의 아이들에 비해 사망률이 절반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2.
어느 백인 교사가 인디언 보호구역 내의 학교로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어 시험을 보이면서 겪은 교훈이다. 평소와 달리 오늘은 특별히 어려운 문제를 내겠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인디언 아이들은 모두 책상을 끌어당겨 한데 모여 앉는 것이었다. 부정행위를 하면 안 된다고 가르치려는 선생님에게 아이들은 “저희들은 언제나 어려운 문제는 함께 힘을 합쳐 해결하라고 배웠는데요.”라고 대답했다. 인간은 협동하는 동물이다. 미국의 대학원 입학 추천서에는 반드시 추천인에게 그 학생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능력이 어떠냐고 묻는 항목이 있다. 기업도 신입사원을 뽑을 때 조직 생활을 얼마나 잘할 수 있는 사람인가를 신중하게 살피는 걸로 안다. 교육은 한 번도 그런 식으로 하지 않았으면서 갑자기 그런 소양을 요구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기막힌 모순이다.

3.
노화 연구의 세계적인 학자들이며 각각 노화에 관한 베스트셀러 『인간은 얼마나 오래 살 수 있는가』와 『인간은 왜 늙는가』의 저자이기도 한 스튜어트 올샨스키와 스티븐 어스태드는 2001년 초 매우 흥미로운 내기를 시작했다. 2000년 여름 미국의 학술잡지 『Scientific American』 인터뷰에서 어스태드 박사가 인간의 수명이 150세에 이를 것이라고 말한 것을 읽고 올샨스키 박사가 전화를 걸어 내기를 제안한 것이다. 두 사람은 각자 신용기금에 150달러를 예치한 다음 죽을 때까지 매년 10달러씩 적립하기로 했다. 그리고 둘 다 사망한 이후에도 앞으로 150년 동안 친척들이 대신 같은 금액을 적립해주기로 약속했다. 비록 지금은 그들이 적립하는 금액이 얼마 되지 않지만 2001년 현재 미국의 금리를 기준으로 계산해보면 2150년에는 약 5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지금부터 2150년 사이에 실제로 150세까지 생존한 사람이 나타나면 적립금 전액이 어스태드 박사의 상속인에게 지불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올샨스키 박사의 상속인에게 지급될 것이다. 만일 마땅한 상속인이 없을 경우에는 현재 각자가 소속되어 있는 연구소에 기증될 것이다.
어스태드 박사는 앞으로 10~20년 이내에 생물학과 의학이 획기적으로 발달하여 노화의 속도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이 개발될 것이라고 믿는다. 2150년 이전에 150세가 되려면 그 사람은 2000년 이전에 태어났어야 한다. 지금까지 최고 수명 기록은 2004년 122세의 나이로 죽은 프랑스의 칼망 여사가 보유하고 있다. 그렇다면 현재 생존하고 있는 누군가가 그 기록을 27년 이상 경신해야 한다. 올샨스키 박사 역시 노화 속도에 관한 연구에 큰 발전이 있을 것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발전이 획기적이라 할지라도 현재 장수를 누리고 있는 몇몇 사람들에게 혜택이 돌아가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이미 상당히 손상된 생존하는 사람들의 유전자를 바람직한 상태로 되돌리기는 거의 불가능할 것으로 예상한다.

최재천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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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즈음 아이들은 영상 세대라서 감성적이고 직관적이며 분별력이 없다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 이런 구분은 뇌의 구조를 조사해보면 타당한 것으로 나타난다. 대뇌는 우반구와 좌반구로 나뉘어져 있다. 우뇌는 시각중추가 연결되어 있어서 시각적 판별 작용을 주로 한다. 따라서 실제 사물의 객관적 해석에 대한 형태적 분별력과 관련된 해독이 이곳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우뇌의 인식은 시각적•본능적•즉각적•감성적•직관적•총체적으로 열정과 연결되어 있는 더운 의사소통(hot communication)과 관련된다. 반면 좌뇌는 시각적 정보처리의 비형태적인 부분을 판별한다. 예를 들면 문자의 해독이 여기에 해당한다. 느린 속도로 정보를 처리하는 단점은 있으나 이성적•분석적•논리적•개념적•추상적인 영역을 담당하여 차가운 의사소통(cold communication)과 관련되어 있다. 결과적으로 영상 문화가 발달한다는 것은 우뇌의 해석 작용에 무게중심이 가는 쪽으로 변화됨을 의미한다. 문자 세대가 좌뇌적 문화라고 한다면 영상 세대는 우뇌적 문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상 세대가 이성이 아니라 감성이 발달했다는 견해는 여기에서 온다.

2.
시뮬라크르(simulacre)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놓은 인공물을 지칭한다. 시뮬라크르는 흉내, 모방과 혼동되기도 하는데 이것은 실수이다. 흉내를 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흉내를 낼 원래 대상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베끼기는 제1열, 혹은 제2열에 속하는 시뮬라크르인 전통적인 재현체계 속의 이미지이다. 시뮬라크르는 흉내낼 대상이 없는 이미지이며 이 원본 없는 이미지는 그 자체로서 현실을 대체하고 현실은 이 이미지의 지배를 받게 된다. 관람객들은 박물관이나 민속촌의 모형들을 보고 옛날 사람들이 살았던 곳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민속촌이라는 시뮬라크르가 관람객들에게 이미 그때 그곳을 상기시킨다.

3.
디자이너는 분석 활동에 필요한 여러 가지 기법들을 습득하는 한편 상황에 따라 적합한 분석 활동을 선별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디자인 분석을 통해 적절한 정보와 데이터를 얻은 다음에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기 위해 시나리오를 짜는 것 같은 종합적인 활동이 필요하게 된다. 분석과 달리 시나리오를 짜는 능력은 경험과 직관에 크게 의존한다.

4.
이야기꾼의 이 신성하고 엄숙한 시간은 문자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를 거치면서 그 초월성과 신성함을 상실하고 비공식적이고 사적인 이야기로 남게 되었다. 사람들이 모여서 이야기하는 것, 그것은 고대 그리스의 아고라 광장에서부터 18세기 커피하우스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수동적인 구경꾼이 아니라 적극적인 참여자로서 논의의 결과가 공동체의 사회, 문화의 영향을 미쳐왔다. 사실 텔레비전 토크쇼는 이런 측면에서 참여 유발적이고 상호작용적이며 사회공론의 장을 마련하는 이야기 공동체와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하겠다. 이 때문에 이웃과 담을 쌓고 사는 고독한 현대인들에게 토크쇼가 인기 있는 것이다.

최혜실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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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트렌드 예측의 위험은 트렌드를 ‘따라잡아야 하는’ 대상으로 간주할 때 더욱 커진다. 예측이 빗나갔을 경우의 기회비용이 막대할 것이기 때문이다. 트렌드를 ‘창조하고 선도할 수 있다’는 관점에서 보면 위험의 문제에서 보다 자유로워질 수 있다. 트렌드 예측은 수많은 기회 중 가장 유력한 기회를 골라내는 하나의 수단이다. 결과의 맞고 틀림보다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트렌드를 예측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가치에 대한 영감을 활성화하고 구체화시키는 실험적 활동이다.

2.
서울대학교 생활과학대학의 소비트렌드분석센터CTC의 방법을 중심으로, 리서치 기반 트렌드예측방법론의 한 예를 소개한다. 이 방법은 ‘연구 설계->자료수집->분석->핵심가치 도출 및 검증->키워드 도출 및 커뮤니케이션’의 5단계를 기본으로 한다.

3.
트렌드 예측도 하나의 연구이다. 연구목적을 고려하여 적합한 방법을 선택하고 구체적인 실행 계획을 수립할 필요가 있다.

4.
현재를 관찰하고 분석하는 단계에서 질적인 차이를 만들어내기는 어렵다. 이미 방법론이 많이 개발되어 있고 너무나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반면, 미래를 상상하고 창조하는 단계에서는 어떻게 했는지도 모르게 엄청난 질적인 차이가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상상과 창조에는 누구나 따라할 수 있는 일반적인 매뉴얼이 없다. 상상과 창조와 같은 통합적이고 직관적인, 그리고 때로 영적인 역량의 역할이 중요하다. 남다른 상상력과 창조력을 갖는 비법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노력은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모든 노력을 경주하기 앞서, 서두에서 언급한 ‘독자적 관점’에 대해 고민하기를 권한다. 어떤 자료를 접하더라도 당신만의 색깔이 묻어나는 한 줄의 문장, 한 장의 스케치를 내놓을 수 있는가? 이미 알려진 방법론을 색다르게 조합하여 사용하는 것보다, 당신만의 관점과 당신만의 키워드가 스스로 자료에 반응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르게 보기’만이 창조를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5.
산업분야별로 체감되는 트렌드 속도에 따라 트렌드 정보를 활용하는 요령도 달라지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메가 트렌드의 관점에서 작은 변화의 의미를 평가하는 것이다. 메가 트렌드와 같은 맥락의 현상인지 여부를 판단하는 것만으로도 복잡한 정보가 일차적으로 걸러진다. 메가 트렌드와 뭔가 다르다고 생각되는 정보만 취사하여 연구해야 한다. 미래 트렌드의 징조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메가 트렌드 관점에서 정보를 검토하면서, 특이 사례만 선별하여 자사만의 트렌드 맵을 구축하는 데 활용한다.

6.
페이스 팝콘은 어떤 사업 아이디어가 미래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4개 이상의 트렌드가 뒷받침해 주어야 한다고 했다. 그렇지 않은 경우, 사업 아이템은 시장의 극히 일부분만을 차지하게 되거나 혹은 일시적인 유행으로 끝나버릴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유럽의 트렌드 전략 전문가인  마티아스 호르크스에 따르면, 기업은 비즈니스 과정과 관련된 5대 트렌드를 결정한 후 구체적인 전략을 고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국트렌드연구소의 김경훈소장은 두 개 이상의 트렌드가 만나서 형성되는 트렌드 로터리에 주목하기를 권하고 있다. 트렌드 간의 상호작용이 새롭고 큰 시장을 형성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러한 권유들은 모두 복수의 트렌드들이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지 주목하기를 권하고 있다. 이를테면 개인화, 1인 가구 증가, 정규직 감소, 고급화 등의 다양한 사회적 트렌드가 만나 주거 문화의 극적인 변화로 이어지고 있는 현상을 살펴보자. 점차 주거의 안정성이 약화되고 주거 형태의 다양화가 가속화되고 있다. 주거단지의 기능적 전문화, 가사 노동의 상품화, 생활권 재편 등의 파급 현상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 개별 트렌드로는 힘을 발휘하지 못하지만, 주변 트렌드와 결합하여 상당한 파급력을 일으키고 새로운 시장을 형성할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트렌드는 서로 의존활 수도 있고, 서로 밀어낼 수도 있다. 어떤 트렌드도 주변 현상과의 연관성 속에서 해석될 때 그 트렌드의 향후 진행가능성에 대한 예측의 정확도를 높일 수 있다. 트렌드간의 상호 작용으로 눈을 돌리자.

7.
디자이너가 트렌드를 앞서간다는 것은 결국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남보다 먼저 낯선 세계로 들어가보지 않고서는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수 없다. 인구구조의 변화, 가족생활의 변화, 시간관념의 변화, 놀이의 변화, 가사노동의 변화를 낯선 눈으로 탐험해야 한다. 내 안에서 관점의 컨버전스가 일어나도록, 낯선 정보와 낯선 경험에 친숙해지자.

8.
필요할 때 마다 전문적으로 대응한다는 차원에서 외부 업체의 컨설팅을 이용하는 것도 좋다. 단 그것이 중심이 된다면 곤란하다. 고급 정보는 제공받을 수 있지만, 트렌드를 보는 독자적인 시각까지 만들어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후발주자로도 충분하다면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트렌드를 선도하고 싶다면 고유한 철학과 관점을 가져야 한다. 어떤 정보를 입수하더라도 독자적인 관점과 체계에 따라 평가하고 정리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가지는 것이 낫다. 외부에서 흘러들어온 어떤 정보도 아무런 터치 없이는 일회성의 그치기 때문이다. 필립스, 노키아, 애플 등 트렌드를 선도하는 기업은 대부분 독자적인 트렌드•디자인 랩을 가지고 있다. 단지 외부에서 흘러들어온 정보를 정리하고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끊임없이 실험을 거듭하는 것이다.

9.
소비자의 시각을 유지하라. 엔지니어가 볼 때는 A가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는데, 실제 소비자의 경험을 분석해보면 A가 아닌 I가 더 결정적인 요인일 수 있다는 것이다. 디자이너도 이런 오류를 범할 수 있다.

10.
그러나 시대가 변하더라도 한 사람이 무엇을 완성하기 위해 걸린 시간의 가치는 여전하며, 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쳐 탄생한 제품들도 그만의 이름과 성격을 알아채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11.
가까운 미래의 집 La casa prossima futura, 1999 © Philips Design

12.
필립스의 심플리시티 연구소 Simplicity lab.는 세계적으로 가장 큰 규모의 디자인 연구 기관으로, 유럽, 북미, 아시아에 8개의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다. 특히 첨단 기술과 사람 사이의 상호 작용에 대한 연구를 꾸준히 진행하고 있는데, 세부 주제는 환경지능Ambient Intelligence, 착용하기에 적합한Wearable 제품, 열린 도구들Open Tools, 연결된 세상Connected Planet등이다.

13.
고산지대에 사는 사람들은 고기와 우유 같은 먹거리뿐 아니라 추위와 바람, 눈과 우박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옷까지 모두 야크로부터 얻습니다. 이처럼 이제부터는 모노컬쳐, 즉 한 사회 내에서 서로 돕고 나누는 문화가 강조될 것입니다. 환경에 해를 끼치지 않는 진정한 고급 제품, 시간이 지나도 쉽게 변하지 않는 고풍스럽고 내구성 강한 의상, 민속적인 아름다움과 자연의 느낌을 담은 옷이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게 되겠죠. 옷을 구입하기 위해 지출하는 비용도 점점 줄어들게 됩니다. 페루의 판초, 티롤식 재킷, 히말라야식 복장처럼 실제 삶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스타일링 트렌드는 금융 경색 이후 소비자들이 열망하게 될 독창성과 개성을 만족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14.
트렌드 예측가 에델쿠르트는 마지막으로 트렌드를 이끌어가고자 하는 국내 기업과 디자이너들에게 다음과 같은 조언을 남겼다.
“기업 스스로가 디자이너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디자이너는 자신의 감수성에 확신을 가질 수 있어야 하구요. 디자이너는 소비자이기도 하기 때문에, 디자이너가 매력을 느낀다면 소비자도 그럴 확률이 높습니다. 통계적 수치로 한정 짓지 마세요.”

서울대학교
소비트렌드분석센터,CTC
한국디자인산업연구센터,KD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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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살아가는 동안, 이런저런 무리한 짓은 많이 하는 편이 좋다. 뭔가 인생의 연륜 같은 것이 있다면, 시간이 흘러 뒤돌아볼 때 몇 개의 선만 유난히 짙은 순간, ‘그러고 보니 그땐 그랬지’라고 떠올리게 되는 순간은 대부분 무리한 짓을 했을 때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2.
산요전기의 충전식 니켈수소전지 ‘에네루프eneloop’를 D&DEPARTMENT에서 취급하기 시작했다. AA전지 두 개와 충전기 세트가 4천 엔 정도. 가격 면에서는 100엔숍의 전지 쪽이 물론 싸다. 이에 대해 스태프와 이야기하니, 역시(하하), 좋은 말을 해주었다. ‘버리지 않으니까 기분이 좋아요’라고. 으음, 역시. 그 말대로인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수도가 없어서 날마다 1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곳까지 물을 뜨러 가던 사람의 집에 수도가 설치되어, 수도꼭지를 돌리는 것만으로 물이 간단하게 나오게 되었던 때의 편리함. 예를 들어 산간에 살고 있어서 매일 두 시간 걸려서 마을로 나오던 곳에 고속도로가 뚫려서 10분이면 나올 수 있게 된 편리함. 그 ‘편리함’과 이 ‘버리지 않고도 해결된다’는 감각은, 왠지 비슷한 점이 있다. 이 제품을 사는 것만으로 문제의 해결에 참가하고 있는 느낌. 프리우스(도요타의 친환경차)에 처음 타서 전지주행하고 있는 순간처럼, 새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느낌과 닮아 있다.

나가오카 겐메이 지음
남진희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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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기 자동차 시장을 보게 되면 우리는 먼저 포드자동차의 모델 T를 생각한다. 그러나 모델 T 이전에도 자동차는 있었다. 다만, 대량 생산되지 않고 매우 소규모로 제작, 생산되어 소수의 한정된 사람들만이 구매할 수 있었을 뿐이다. 이때의 자동차는 그 모양이 제각각이었다. 그러나 모델 T가 뛰어난 성능과 저렴한 가격으로 시장을 지배하게 되자 그 이후에 나타난 자동차들은 기본적으로 모델 T를 닮게 되었다. 즉 모델 T 이후의 자동차들은 동력 장치, 동력 전달 장치, 조향 장치 등 기본적 속성이 동일했고, 다만 색상이나 내장재 등과 같은 세세한 부분에서만 차이를 보였다. 이를 통해 소비자들은 자동차의 성능은 차이가 있겠지만 기본적인 속성은 동일함을 인식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시장 지배자는 제품의 정체성과 핵심적 기능을 규정하고, 다른 업체들도 이를 쫓아오고 있다는 면에서 ‘표준’과 개념을 같이하고 있다.

2.
그런데 MS의 컴퓨터 운영체제인 윈도의 경우 우리는 별다른 고민 없이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구입하고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을 ‘밴드웨건 효과(band wagon effects)’라고 한다. 밴드웨건은 서커스 행렬의 맨 앞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분위기를 띄우는 악대 차이다. 따라서 밴드웨건 효과는 특정 상품을 구매할 때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그 상품을 구매했는가에 의해 영향을 받는 현상을 말한다. 일종의 심리 현상이다.

3.
이 변기는 우리 생활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소변만으로는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 지문이 사람마다 다른 것처럼 사람들의 엉덩이문(hip-print)도 모두 다르다고 한다. 따라서 변기는 사람의 엉덩이가 닿는 순간 등록된 가족 구성원 중 누구의 소변인지를 인식해 해당 정보를 병원에 전송하게 된다. 이러한 변기가 모든 가정에 보급되면 이제 남자들도 앉아서 소변을 봐야 하는 시대가 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 변기는 전통적인 변기인가, 의료기기인가, 아니면 정보통신 기기인가? (앞으로 이와 같은 산업의 분류는 의미가 없어질 것이다)

4.
일본의 자전거 제조업체들은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 비교적 잘 운영되었다. 그러나 유럽의 자전거들이 일본 시장에 진출하고, 영국 파운드화의 가치가 하락하면서 시장 경쟁력을 급격히 잃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1954년 일본정부는 자국의 자전거 제조업체들이 우수한 유럽산 자전거와 경쟁할 수 있도록 자전거의 일본 공업 규격(JIS)을 제정했다.
JIS는 자전거를 크게 14개 부품으로 나누고, 각 부품들도 평균 18개 부분품으로 구성하도록 하여 거의 모든 자전거 부품에 대한 규격을 상세하게 정했다. 이러한 상세 규격에 따라 일본의 중소 자전거 제조업체들은 균일한 품질의 자전거를 제작할 수 있었고, 당연히 자전거 품질도 향상되어 유럽 제품에 대항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표준화 정책이 성공을 거두자 일본정부는 지속적으로 표준을 향상시켰다. 그러나 이와 같은 표준화 정책으로 일본의 기업만 이득을 본 것은 아니었다. JIS는 지구상의 모든 이에게 개방되어 있고, 또 모든 부품에 대해 상세한 규격을 정해놓았기 때문에 중국과 대만의 제조업체들도 동일한 규격으로 자전거를 생산할 수 있었다. 1990년 자전거 관세가 폐지된 이후 일본의 자전거 시장은 중국과 대만 업체에 의해 심각하게 잠식되었고, 1998년에는 중국이 최대 수출국이 되었다. 2000년에 이르러서는 수입액이 국내 생산을 넘어섰고, 마침내 최근에 이르러 일본의 자전거 조제품 업체는 거의 도산할 지경에 이르렀다.

5.
그런데 주의력 있는 승객의 경우, 지하철 1호선은 지하 서울역에서 지상 서울역으로 오고 갈 때, 지하철 4호선은 남태령역에서 선바위역으로 오고 갈 때 실내등이 꺼졌다가 다시 켜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전동차 운행이 지하철 공사와 철도청으로 이원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하철공사는 직류 1,500V를 사용하고, 철도청은 교류 2만 5,000V를 사용하기 때문에 그 경계에서 직교류 교환 장치가 작동된다. 문제는 승객들이 느끼는 불편함뿐만 아니라 그 비용에 있다. 이 교환 장치 때문에 전동차 1대당 1억 5,000만 원의 추가 비용이 든다. 또 다른 문제는 지하철의 운행 방향이 우측통행인 반면, 철도청의 운행 방향은 좌측 통행이라는 점이다. 이 때문에 지하철 구간과 철도청 구간이 만나는 지점에서는 선로를 X자로 서로 엇갈리게 건설했고, 이로 인해 4호선의 경우 완공 시기가 6개월 더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공사비도 일반 구간보다 30% 이상 더 늘었다.

6.
2월 7일 일요일 오전 10시경 볼티모어 시내에 위치한 허스트 빌딩 지하에서 시작된 화재는 1시간도 못 되어 시 전체를 삼킬 듯이 확산되었다. 이에 화재를 진압할 소방차가 부족함을 인식한 볼티모어 시는 인근 지역에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워싱턴 D.C., 뉴욕, 필라델피아 등에서 온 소방차의 연결 호수는 볼티모어 시의 소화전과 규격이 맞지 않았다. 당시까지 미국의 각 주는 자체적으로 소방 장비에 대한 표준을 정했고, 서로간의 호환성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로 인해 하루 만에 진화할 수 있었을 화재가 다음 날 오후가 되어서야 진압되었고, 그 결과 70블록에 걸쳐 1,500개 이상의 건물이 잿더미가 되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표준화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고, 미국은 1년 후 소방 안전 장비에 대한 국가 표준을 만들었다.

7.
ATX 규격(인텔이 발표한 마더보드 규격)에 대한 대만 업체의 참여는 인텔에 선순환의 효과를 주었다. ATX 규격 덕분에 컴퓨터 제조업체들은 마더보드를 구매할 때 특정 공급업자의 제품을 구매할 필요가 없어졌고, 따라서 공급업자 간의 경쟁이 일어났다. 또한 대만 업체들의 참여로 ATX 규격의 마더보드가 대량 생산되었다. 공급업자들 간의 경쟁과 대량 생산으로 마더보드 가격은 하락했고, 이는 PC 가격 인하로 이어졌다. PC 가격이 낮아지자 최첨단 PC 수요가 늘어났고, 이 수요 증가는 인텔의 수익을 획기적으로 높였다.

8.
핵심 제품을 보유하고 있는 기업의 경우 보완재 시장은 경쟁이 치열해야만 유리하다. 보완재 시장이 독과점의 형태를 띠게 된다면 보완재 시장의 성장은 이들 독과점 기업에 유리한 형태로 결정되고, 그에 따라 핵심 시장의 성장도 이들 기업의 결정에 의해 좌지우지될 것이다. 따라서 이 경우 핵심 제품을 생산하는 기업은 이들 보완제가 제품(product)보다는 일상재(commodity)적 성격을 띠도록 만들어야 한다. 보통, 제품과 일상재를 구분하는 기준은 ‘브랜드가 제품 구매 결정에 영향을 미치느냐’에 있다. 예를 들어, 진통제를 구입할 때 특정 브랜드의 진통제를 원한다면 그 진통제는 제품이다. 반면, 특정 브랜드를 고집하지 않고 아무 진통제나 구입하려 한다면 일상재가 된다. 상품이 제품화되면 차별화 전략이 가능하지만, 제품이 일상재화되면 기업은 비용 우위 전략 이외에 다른 전략을 추구하기 어렵다.
이처럼 일상재가 된다는 것은 차별화가 어렵다는 뜻이다. 그리고 보완재를 일상재로 만들기 위해서는 보완재를 생산하는 모든 업체들이 제품을 생산할 때 표준화를 통해 동일한 규격을 적용 받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일상재가 되는 시장에서는 반드시 경쟁이 치열해지고, 따라서 시장의 주도권은 핵심 제품을 생산하는 곳에서 가져갈 확률이 높아진다.

9.
오랜 연구와 노력으로 만들어진 CD도 표준을 정하는 데 최첨단 기술력만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CD를 제작할 때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음악 재생 시간과 관련 있는 CD의 직경이었고, 이 CD 직경과 용량 표준화의 기준은 바로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이었다. 당초 필립스 연구진은 LP판보다 용량이 큰 1시간 분량의 11.5cm CD를 제작하려고 했다. 그러나 회의 중 소니의 노리오 오가 부회장이 음악을 기준으로 삼자며 <합창>을 예로 들었다. 당시 베를린 필의 지휘자였던 카라얀의 연주는 66분이 걸렸으나, 필립스의 자회사인 폴리그램에서 확인한 결과 최장 연주 시간은 74분이었다. 결국 74분 이상의 음악 재생 시간을 담기 위해 직경 12cm CD 표준이 확정되었다.

10.
DVD플레이어 시장의 경우, 일본기업의 주도로 표준화가 이루어졌다. 이를 통해 우수한 생산 시스템을 갖고 있는 한국의 삼성전자와 LG전자가 세계 시장에서 높은 점유율을 보이고 있으며, 저가 상품 시장에서는 중국기업들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DVD플레이어 완성품시장에서는 표준화를 주도했던 일본기업들이 충분한 수익을 올리고 있다고 보기 힘들다. 그러나 많은 일본기업들은 컨트롤 칩셋, 광픽업, 레이저 다이오드 등 DVD플레이어의 핵심 부품에 대한 기술을 특허로 보호하거나, 아예 블랙박스로 두어 비공개로 하면서 대부분의 세계 시장을 점유하고 있다. 이와 같은 전략은 표준화를 통해 시장을 확대하고, 특허나 기술의 비공개로 차별화된 부품을 제공함으로써 표준과 특허를 성공적으로 절충한 것이라 하겠다.

강병구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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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에 살고 있는 외국인은 2007년 8월 현재 100만 254명으로, 전체 인구 4,913만 명의 2%에 해당한다. 이 가운데 90일 이상 머무는 장기 체류 외국인은 72만 4,967명으로, 1980년 4만 519명에 비해 17.8배나 늘었다. 한국 사람과 결혼한 이민자는 10만 4,749명으로 2002년의 3만 4,710명보다 세 배 증가했다. 국제결혼은 1990년 1만 281건, 2000년 1만 2,355건이던 것이 2003년 2만 5,658건, 2005년 4만 3,751건으로 급증하고 있다. 이에 따라 ‘혼혈 인구’도 크게 늘어나고 있다. 2006년 약 3만 5,000명이던 혼혈 인구는 2020년이 되면 167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20세 이하 인구 5명 중 1명, 그리고 신생아 3명 중 1명이 혼혈아가 될 전망이라는 것이다.

2.
우파 민족주의는 자유와 부강이 근대사회의 지향점이며 이 목표는 민족을 단위로 실현된다는 입장이다. 우파 세계주의는 자유와 부강이라는 목표는 같지만 이는 세계적 차원에서 추진되기 때문에 민족의 굴레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좌파 민족주의와 좌파 세계주의는 평등과 자주가 자유와 부강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점에서 이들과 구분된다. 양자 사이의 차이는 좌파 민족주의가 그 실천의 매개를 민족이라고 보는 데 비해, 좌파 세계주의는 민족이 개인의 자주와 평등을 가로막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민족을 넘어선 세계적인 협력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이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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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통 브랜드 자체를 ‘꽃병’으로, 디자이너를 ‘꽃’으로 비유한 것은, 내가 항상 해왔던 말이다. 지금 이 순간 가장 아름다운 ‘꽃(디자이너)’을 수시로 바꿔 꽂아가며 ‘꽃병(브랜드)’을 장식하는 것, 그것이 바로 새로움을 추구하며 살아남는 전통 브랜드의 수법인 것이다.

2.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선 지금은 나노테크놀로지나 마이크로머신 분야처럼 그 자체에 생명력을 가진 섬세한 테크놀로지 기술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기능을 제대로 디자인할 수 있다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21세기의 새로운 기능미가 표현될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 일례가 바로 ‘Morph3’로 야마나카 슈운지가 디자인한 로봇이다. 이것은 단순히 인간의 모습을 모방하기만 한 휴머노이드가 아니다. 엔지니어링과 디자인의 양면을 만족시키면서 인공지능을 비롯한 다양한 기능을 로봇으로 구현하는 궁극적인 기술미의 추구라 할 수 있다.

3.
향수 개발의 기본 프로세스는 다음과 같다. 우선 향수의 콘셉트가 정해지면 조향사와 향수병 디자이너가 그것에 맞추어 동시에 작업을 진행한다. 그렇게 개발한 여러 종류의 향과 향수병 디자인이 프레젠테이션에서 발표되고, 그 중 가장 훌륭한 향과 디자인의 조합이 신제품으로 발표되는 것이다. 향과 디자인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동등한 위치에 있다.

4.
브랜드의 어원은 고대 노르웨이 어인 ‘브랜드르brandr: 불에 달구어 표식을 찍는다는 뜻. 불에 달군 쇠로 낙인을 찍어 가축의 소유주를 구별하는 데서 유래한 말이다.’

5.
무엇보다 오토노미는 몸체가 교환식이기 때문에 차종에 상관없이 만들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자동차의 안전성만 확보할 수 있다면 누구라도 자유롭게 자동차를 디자인하게 될 지도 모른다. 건축가에게 자신이 살 집의 디자인을 발주하는 것처럼 미래에는 제품 디자이너에게 자가용 디자인을 의뢰하는 식으로 자동차 제작 시스템이 변하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6.
이렇듯 복잡한 디자인의 불꽃이 가능해진 이유는 제작 현장에 컴퓨터 시스템이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직접 쏘아 올리지 않아도 시뮬레이션 화면으로 제작할 수 있기 때문에 효율적이며 개발 속도도 빨라졌다. 경험과 감으로 작업하던 불꽃놀이 기술자들도 점차 CAD디자이너처럼 되고 있다고 한다.

7.
불을 붙인다는 단 하나의 기능밖에 없는 라이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하고 풍부한 디자인을 선보이는 라이터라는 존재는 제품 디자인의 진화가 기능의 진화에서만 유래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한다.

8.
공개 토론의 또 한 명의 참가자 프랭크 게리는 에코 디자인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wiggle side chair’를 만든 인물. 종이 박스를 S자 모양으로 구부리는 과정을 몇 번이나 반복해 형태를 만들어간 이 의자는 친환경일뿐만 아니라 온순하고 부드러운 그의 인품을 그대로 드러낸다.

9.
확실히 자동차를 중심으로 하는 지금의 도시교통 시스템은 풀어야 할 숙제가 많다. 세계의 대도시는 대기오염, 교통 체증, 주차장 부족 등의 공통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리고 이 문제를 풀기 위한 해답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경전철 LTR Light Rail Transit’이다. 1990년대 이후 유럽에는 거리 중심부의 자동차 출입을 규제하고 그에 대한 대체 수단으로 경전철을 도입한 도시가 많다. 외곽에 차를 주차하고 도시 내에서는 경전철로 갈아타는 ‘Park & Ride System’이 바로 그것이다.
경전철이 등장하게 된 배경에는 ‘패스트 라이프’에서 ‘슬로 라이프’로 이행해 가는 현대 사회의 커다란 사회적 흐름이 존재한다. 도시 교통이 ‘자동차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변하는 과정 속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경전철인 것이다. 그리고 이 경전철은 ‘이동 수단’이라기보다는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에 가까운 ‘이동 장치’라는 의미에 더 가깝다.

10.
나이키 광고를 만들었던 미국의 광고회사 ‘Wieden & Kennedy’에는 존 제이John C.Jay 라는 크이에이티브 디렉터가 있다. 존 제이에게 광고 제작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점이 무엇이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는 이 질문에 “의사결정권자에게 직접 이야기를 듣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광고 제작 현장의 담당자가 아닌 기업의 최종결정권자와 직접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을 통해, 그 기업이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혹은 그 기업이 고민하는 문제의식이 무엇인지에 대해 함께 공감할 수 있다고 한다.

11.
바이올린, 피아노, 첼로, 베이스, 기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악기를 디지털화해 만들어진 야마하의 ‘사일런트Silent’시리즈도 대단히 인상적인 디자인이다. 연주자와 악기 간의 관계는 그대로 남겨둔 채, 음을 만들어내는 데 필요 없는 부분은 과감하게 생략한 독창적인 발상이 돋보인다. 그 덕에 사일런트 시리즈에서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결합으로 탄생한 진정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디자인을 찾아볼 수 있다.

12.
애플 컴퓨터가 일반 사용자를 위해 발매한 미디 소프트웨어 ‘Garage Band’가 바로 그것이다. 이는 자신만의 음악을 간단하게 제작, 연주 할 수 있게 한 소프트웨어로, 사용법 또한 간단하다.
앞으로의 시대에 악기로서 활용할 가능성이 가장 큰 것은 휴대전화가 아닐까. 휴대전화로 연주 혹은 작곡을 즐길 수도 있을 것이며, 음악을 배달하는 소프트웨어를 사용해 친구에게 메일로 보낼 수도 있다.

사카이 나오키 지음
김향, 정영희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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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로자노-햄머의 최근 프로젝트 역시 교환에 관한 것이다. 2005년 멕시코시티의 시케이로스 공공미술관 엘쿠보에 전시된 그의 작품 <SUBTITLED PUBLIC>은 관람객을 컴퓨터 적외선 감시시스템으로 추적하는 텅 빈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설치예술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 몸 위에 문자가 투사되는데, 이는 3인칭 주어 형식에 맞게 변형된 부제로 사람들이 어디를 가든 따라다니게 된다. 자기 몸에 투사된 부제를 떼어내려면 다른 사람과 접촉해야 하는데, 이때 접촉한 사람과 그 단어를 교환하게 된다. 이 작품은 감시시스템이 각각의 인종을 추적하여 고정관념을 심어주는 것에 대한 훌륭한 비판이며, 더 넓은 의미로 보면 개인을 소비자로 ‘테마화’ 혹은 ‘브랜드화’하는 기술적 진보에 의한 개인화를 비판하는 것이다.

2.
2002년 베니스건축비엔날레의 스위스관을 위해 제작된 <HORMONIUM>에는 플렉시 유리바닥과 형광 UV관이 장착되었으며 산소 농도를 14%로 낮추어 비행기 탑승 때와 비슷한 행복감을 느낄 수 있게 하였다. 미술가 장-뤽 빌무트와 작업한 <HYDRACAFE>는 이중으로 수분을 공급하는 형태를 취하였다. 즉, 음료수를 마시는 것은 물론 환경을 습하게 하여 공공공간의 에어컨 사용개념에 정면으로 맞섰다. 지붕에는 물받이를, 바닥에는 초음파장치를 설치함으로써 습한 구역과 건조한 구역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하였다. <MELATONIN ROOM>은 신체와 공간 사이의 관계를 밝히는 시도였다. 이 작품 역시 두 가지 인위적인 기후가 번갈아가며 재현된다. 전자파를 통해 신체의 세로토닌 생성을 억제하면 물리적•화학적으로 매우 흥분되고 고무적인 기분이 된다. 반면 자외선을 통해 세로토닌 생성을 촉진하면 나른한 느낌을 갖게 된다.

3.
이 프로젝트는 개인의 거주공간으로서 주택개념을 다른 도시에 있는 집들을 연결하는 개념으로 확장하는 통신시스템이라는 점에서 독특하다. <REMOTEHOME>은 동시에 서로 다른 두 지역에 존재하는 하나의 아파트인데 이곳의 바닥공간은 디지털네트워크를 통해 꿰매어 합쳐져 두 도시에 나누어져 있다. <REMOTEHOME>은 생활문화의 변화와 멀리 떨어진 두 곳의 관계증진에 대응하여 반응한다. 휴대폰과 메시지 전송을 포함한 통신미디어 기술이 거리를 뛰어넘는 새로운 우정과 친밀감의 공유수단을 제공하고 있지만, <REMOTEHOME>은 실시간으로 매개되는 의사소통이 우리 일상생활과 우리가 사는 공간, 우리가 사용하는 가구, 그리고 우리가 아끼는 물건의 일부가 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지 묻는다.

루시 불리반트
태영란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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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클로이는 오빠가 죽은 직후 [그녀가 막 여덟 살 생일을 지났을 때였다] 매우 철학적인 단계를 거치게 되었다. “나는 모든 것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어. 죽음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했거든. 그렇게 되면 누구라도 철학자가 되지.” 그녀의 가족들이 지금도 넌지시 이야기를 하곤 하는 그녀의 주요한 강박관념들 가운데 하나는 데카르트와 버클리의 독자들에게는 익숙한 것이다. 클로이는 자기 눈을 두 손으로 가리고 가족에게 오빠가 살아 있다고 말했다. 그녀에게 가족이 보이는 것과 똑같이 마음속에서 오빠가 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마음속에 오빠가 보이는데 왜 오빠가 죽었다고 하는가? 그녀는 거기서 더 나아가 실재(實在)에 더 큰 문제를 제기했다. 클로이는 부모에게 느끼던 감정 때문에, 그들에게 자신이 눈을 감고 그들을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을 죽일 수 있다고 [적대적인 충동의 힘과 마주한 여덟 살짜리 소녀답게 싱긋 웃으며] 말했던 것이다. 물론 이 계획은 부모에게서 심오하게 비철학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2.
물론 종교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진리의 가치는 수백 년 전부터 의심을 받았다. 파스칼[1623-62, 곱사등이 얀센파, 『팡세』의 저자]은 모든 기독교인이 신 없는 무시무시한 우주와 신이 존재하는 행복한, 그러나 훨씬 더 먼 우주로 불균등하게 나누어진 세계에서 선택에 직면해 있다고 말했다. 파스칼은 설사 신이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더라도, 그 작은 가능성이 주는 기쁨이 더 큰 가능성이 주는 혐오를 압도하기 때문에 신에 대한 우리의 신앙은 충분히 정당화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어쩌면 사랑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연인들은 오랫동안 철학자 노릇을 할 수가 없다. 연인들은 의심하고 캐물으려는 철학적 충동에 대립되는, 믿고 신앙을 가지려는 종교적 충동에 굴복한다. 연인들은 사랑 없이 의심을 하는 것보다는 틀려도 사랑을 하는 모험을 더 좋아한다.

3.
어쩌면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아주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하는 말을 이해하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제대로 말을 할 수 없다는 것도. 본질적으로 우리는 사랑을 받기 전에는 온전하게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4.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우리 자신에 대한 느낌은 달라진다. 우리는 조금씩 남들이 우리라고 생각하는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자아는 아메바에 비유할 수 있다. 아메바의 외벽은 탄력이 있어서 환경에 적응한다. 그렇다고 아메바에게 크기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자기의 규정적인 형태가 없을 뿐이다. 부조리한 사람은 나에게서 나의 부조리한 측면을 끌어낼 것이다. 그러나 진지한 사람은 나의 진지한 측면을 끌어낼 것이다. 누가 나를 수줍어한다고 생각하면, 나는 아마 결국 수줍어하게 될 것이다. 누가 나를 재미있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계속 농담을 할 가능성이 높다.

5.
어린 시절 내내 나는 겨울방학을 고대했다. 가족이 두 주 동안 알프스로 스키를 타러 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산꼭대기에 올라가 밑의 소나무로 덮인 골짜기와 위의 부서질 듯한 파란 하늘을 보면 실존적인 불안에 완전히 사로잡히곤 했다. 그러나 그 일에 대한 기억에는 그런 불안이 증발해버리고 없었다. 기억은 객관적인 조건들 [산꼭대기, 부서질 듯한 파란 날]로만 이루어져서, 실제 그 순간을 힘겹게 만들었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의 불안은 내가 코를 줄줄 흘렸거나, 목이 말랐거나, 목도리를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니었다. 한 해 내내 나를 위로해주었던 미래의 가능성 하나가 마침내 현실이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주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슬로프 바닥에 이르자마자 나는 산을 돌아보며 완벽한 활주였다고 혼자 되뇌었다. 스키를 탔던 방학은 [일반적으로 내 삶의 많은 부분도] 그렇게 흘러갔다. 아침의 기대, 현실에서의 불안, 저녁의 유쾌한 기억.

6.
“인간의 모든 불행의 자기 방에 혼자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생긴다.” 파스칼의 말이다. 맥없이 사회적 영역에 의존하는 것을 넘어서서, 자신의 독자적인 능력을 쌓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에서 이것을 성취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프루스트는 무하마드 2세의 이야기를 해준다. 그는 하렘의 한 아내를 사랑하게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자 즉시 그녀를 죽이게 했다. 다른 사람에게 영적으로 종속되어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무하마드 2세를 흉내내기는커녕, 오래 전에 자족성을 성취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렸다. 나는 내 방에서 나와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다른 인간에게 기초하여 자신의 삶을 구축하는 데서 오는 위험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7.
“문제를 말하면 진짜로 문제가 생겨.” 클로이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8.
영혼은 낙타의 속도로 움직인다는 아랍 속담이 있다. 우리 대부분은 시간표와 다이어리의 엄격한 요구에 이끌려 가지만, 마음의 자리인 영혼은 기억의 무게에 힘겨워함 노스탤지어에 젖어서 느릿느릿 뒤따라온다. 만일 모든 연애가 낙타에게 짐을 더 얹는 것이라면, 사랑의 짐의 의미에 따라서 영혼의 속도는 더 느려진다고 생각할 수 있다. 나의 낙타가 마침내 클로이의 기억이라는 엄청난 무게를 떨쳐버렸을 때, 낙타는 죽기 직전의 상태였다.

노스탤지어 : 고향을 몹시 그리워하는 마음. 또는 지난 시절에 대한 그리움.

9.
지혜는 우리에게 평정과 내적 평화를 목표로 삼으라고 말한다. 불안, 두려움, 우상숭배, 해로운 정열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라고 말한다. 지혜는 우리에게 우리의 첫 충동이 꼭 진실한 것은 아닐 수도 있다고, 이성을 훈련시켜서 무익한 요구와 진정한 요구를 분리하지 않으면 욕심 때문에 길을 잃을 수도 있다고 가르친다. 지혜는 우리에게 상상력을 통제하라고, 그러지 않으면 그것이 현실을 왜곡하여 산을 흙 둔덕으로, 개구리를 공주로 바꾸어버릴 수도 있다고 가르친다. 지혜는 우리에게 두려움을 제어하라고, 그래서 우리에게 해를 주는 것은 두려워하되 벽에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보고 에너지를 낭비하지는 말라고 가르친다. 지혜는 우리에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두려움 자체라고 가르친다.

알랭 드 보통 Alain de Botton
정영목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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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완성된 것은 단순한 성과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열의와 심혈을 기울였는가 하는 점이 중요하다.

2.
“좋아하는 디자이너는 없어요.”
이 말은 역사 속에서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거나, 그 어떤 것도 모르고 있다는 의미 중의 하나다. 즉, 공부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 세계가 좋아서 견딜 수 없을 때에는 자신이 속해 있는 분야와 관련된 모든 것이 궁금해지고 나름대로의 걱정도 하게 된다. 인테리어 디자이너라면 인테리어업계의 역사를, 건축가라면 건축업계의 역사를 풀어헤쳐 보고 싶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욕구다.

3.
오사카에서 일을 하다 문득 생각했다. 녹이 슨 테이블 다리를 철솔로 문지르고 있을 때였다. ‘나는 지금 낡은 것을 새것에 가깝게 만들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낡은 것을 새것으로 만들고 있는 것일까?’
이것만으로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표현하면 어떨까. 하얀 벽이 더러워졌다고 하자. 이것을 다시 하얗게 만들고 싶을 때, 세제 등을 이용하여 ‘얼룩을 닦는다’는 생각과, ‘하얀 페인트를 사용하여 덧칠을 한다’는 생각이 있다. ‘새롭다’는 것은 무엇일까. 여기에는 두 가지 해석이 존재한다. 하나는 ‘새것’, 또 하나는 ‘낡지 않은 것’. 열심히 녹을 벗겨 내던 도중에 ‘너무 심하게 벗겨 낸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D&DEPARTMENT의 고객은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아마도 새것에 가까운 것이 아니라 고풍스러우면서 깨끗한 것이 아닐까.

4.
현명한 상인은 경쟁 상대를 만든다.

5.
‘위기일발’이라는 인기 게임이 있다. 통에 칼을 찔러 해적이 튀어나오면 패배하는 게임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위기일발 게임이 있지요? 통에 칼을 찔러서 검은 수염의 해적이 튀어나오면 패배하는 게임말입니다. 하지만 해적이 튀어나오는 것을 승리로 정하면 패배가 아닌 승리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럴 수도 있다. 규칙을 그렇게 바꾸면 간단한 것을.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까지 살아온 38년 동안, 나는 줄곧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 된다. 검은 수염을 가진 해적이 튀어나오는 경험도 몇 번이나 있었고. 사실 이 게임에 정답은 없다. 게임설명서에 ‘승패’가 기재되어 있다면 몰라도. 38년 동안 칼을 찌르면서 ‘위험해! 지겠어!’라는 생각에 초조해했던 것이 어쩌면 ‘됐어. 이길지도 몰라!’라고 생각해야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견해만 바꾸면 부정이 긍정으로 바뀌는 상황은 인생에 얼마든지 존재한다.

6.
‘꿈이란 평범한 노력을 통해서는 손에 넣을 수 없는 것.’ 물론 돈으로도 살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텔레비전을 시청하다가 어떤 사람을 알게 되었다. 그 사람은 몸이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에게 여행을 시켜 주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몸이 자유롭지 못한 사람의 마음을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사람이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은 어쩌면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기 어려운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소한 문제부터 여행과 같은 큰 문제까지, 주변 사람에게 폐를 끼칠지 모른다는 생각에 부탁하기 어려운 그런 문제들일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들에게 ‘부탁하기 어려운 일’이 현실적으로 실현된다는 것은 ‘꿈 같은’ 이야기가 아닐까. 이런 서비스는 자원봉사자들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받는 쪽은 상대방이 아무리 자원봉사자라고 해도 그에게 폐를 끼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편할 리 없다. 사실은 저 곳에 가보고 싶지만 솔직하게 요구하기 어렵다. 그런 경우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돈을 지불해도 좋다. 내가 가고 싶은 장소에 가고 싶을 때에 마음껏 갈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을 실현시켜 줄 사람이 있다. 꿈을 돈으로 실현시켜 주는, 바로 그 사람이다.
사실, 그 회사를 운영하는 사람도 돈을 벌기 위해 그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봉사활동이라는 명목을 내걸 경우, 받는 사람의 입장이 편할 리 없기 때문에 굳이 돈을 받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꿈’은 ‘평범하게 팔아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7.
엄청난 기세로 가속화되는 느낌. 그것은 감동이었다. 단원 한 사람 한 사람의 행동도 재미있다. 금발의 청년, 귀여운 느낌의 여성, 전형적인 아주머니, 그리고 넥타이를 맨 평범한 샐러리맨으로 보이는 아저씨. 물론 그중에는 음악가처럼 보이는 멋진 신사도 있었다. 그 ‘소리’에 모든 것을 내맡기고 귀를 기울이고 있는 동안,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이 사람들은 무엇을 해서 먹고 사는 것일까. 물론 일본필하모니교향악단이라는 ‘회사’로부터 급료를 받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 각자 예를 들면, 다른 장소에서 음악 교실을 운영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음악과 관계가 없는 다른 일을 통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일본필하모니교향악단에 참가하는 것만으로 생활이 보장될 리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순간, 문득 내가 운영하고 있는 디자인회사가 떠올랐다. 우리 회사가 이 일본필하모니교향악단이라는 집합체라면 사원들 각자는 여기에 모여 참가하는 데에 의의와 긍지를 느낄 것이다. 그리고 역사가 이어질 것이다.
사람들은 여기에 모이지 않는 날은 각자 나름대로 연습하는 한편 다른 일을 통하여 생계를 유지한다. 여기에 모이는 이유는 완전한 ‘공연’을 위한 것이고 연습을 하기 위해 여기 모이기 전에도 각자 엄청난 양의 연습을 할 것이다. 충분한 연습을 하고 ‘연습’을 위해 모이고 ‘공연’이라는 무대를 맞이 한다.

8.
이런 체험들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마사지숍의 경우 ‘다섯 명 한정’을 내세워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기본적인 관찰을 하고 ‘예약 취소가 발생했다’며 접수를 하는 것이 아닌가. 또 민박집의 경우에는 일부러 끝나지 않는 회원 등록을 만들어 놓고 결과적으로 직접 메일을 주고받게 하여 예약을 받는 것이 아닌가.
언뜻, 일방적으로 거절을 당한 것 같지만 결과가 이런 형식으로 끝난다면 기분 나쁜 일이 아니다. 이쪽이 ‘단순한 고객’으로서 교섭이나 예약, 의뢰를 한다. 이 ‘연락한다’는 최초의 접점은 그 이후의 인상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일부러 거절을 하고 시간을 둔 다음에 연락을 한다거나 일단 화가 나도록 유도한 다음에 순조로운 절차를 통하여 그 불만을 해소해 줌과 동시에 감동과 만족을 안겨 주는 방법.
하루에 다섯 명. 완전예약제. 말은 그렇지만 사실은 50명을 받는지 100명을 받는지 알 수 없다. 단, 예약을 하려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설사 40명째에 해당한다고 해도 결국 ‘귀중한 다섯 명 안에 해당하는 사람’이 된다. 더구나 예약이 취소되었다는 이유에서 그날 마사지를 받게 된다면 자기는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에 연락을 받자마자 즉시 달려갈 것이다. 물론 그런 상황에서 예약을 취소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테니까.

9.
옛날에는 먹을 수 없던 음식이 어느 틈에 기호 식품으로 변하거나, 어린 시절 ‘맥주는 쓰기만 한 음료’라고만 생각했던 사실은 까맣게 잊어버릴 정도로 성인이 되면 맥주의 시원한 맛을 사랑하게 되기도 한다. 이처럼 시간도 변하고 유행도 변하고 우리들 자신도 변한다. 이런 변화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10.
직원들과 점장은 매년 사장 나카오카가 화를 내지 않도록 ‘약간 다른 방식으로 크리스마스를 표현’하기 위해 진땀을 흘린다. 언제였던가. 그 해 크리스마스에 도쿄 본점의 사이토점장은 약 200개의 양초를 입구에 밝혔다. 실제로 해 보면 이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 양초들은 어떤 트리나 네온보다 훨씬 더 멋져 보였다.

11.
예전에 건축가 마리오 보타Mario Botta가 “내게 일을 맡기고 싶으면 내가 있는 장소로 오라.”고 말하고 취재에 응했다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난다. 그것은 ‘맡기고 싶은 일’이 ‘잡무로서의 일’인지, ‘그 사람의 사고방식에 따라 탄생하는 작품’인지와 관련된 문제라고 생각한다. 후자에 해당한다면 고객은 당연히 그 디자이너에 관하여 충분히 이해해야 한다. 또 디자이너의 입장에서는 고객이 자신의 창작 환경을 살펴보고 판단해 주기를 바랄 것이다. 이것은 오만이 아니라 일종의 프리젠테이션으로서 판단 재료로 삼아달라는 메시지다.

12.
20대에는 생각하지도 않았던 일이다. 당시에는 오직 주변에만 신경을 썼다. 그러고 보면 30대는 어쩌면 ‘주변과 자신’ 40대는 ‘자신과 사회’에 해당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50대는 ‘사회’, 60대는 ‘자신’이 아닐까.

나카오카 겐메이
이정환 옮김
,
1.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에, 북쪽 지방에 어떤 가족이 멋진 판잣집에서 살고 있었다. 집의 가운데에는 굴뚝 달린 난로가 있어서, 수수한 판자로 둘러싸인 벽에 온기를 느끼게 했다. 겨울에 가족들은 난로 주변에 모여들었다. 이곳은 이 짓에서 열과 빛의 유일한 원천이었다. 이곳에서 아이들은 공부를 했고, 부모들은 그날 소식을 교환했으며, 할머니는 자수를 놓았다. 난롯가는 대가족을 하나로 뭉치게 했다.
그 후 에너지를 공급하는 파이프-전선과 중앙난방 배관 등-가 설치 되었다. 가족들은 집안 어디서나 따뜻함과 빛을 얻을 수 있었다. 단지 명절이나 축제 때의 향수 어린 오락거리용 말고는 난로에 불을 붙여야 할 필요가 없어졌다. 아이들은 자기들 방문을 걸어 잠그고 숙제를 하거나 음악을 들었다. 부모들은 서로 다른 교대 근무시간에 일하기 시작했으며, 냉장고 문에 서로 퉁명스러운 메모를 붙여놓았다. 할머니는 짜증나고 지루해져서, 곧 에어컨 시설이 갖추어진 피닉스(Phoenix) 근처의 양로원으로 옮겨갔다. 그곳에서 할머니는 당신과 비슷하게 가족들에게서 소외된 다른 동료들과 빙고놀이를 했다. 난로 주변은 더 이상 사회적 결속의 역할을 할 수 없었다.

2.
Form fetches function.
이런 식으로 소프트웨어가 어디든지 자유롭게 움직이고, 여기에 접속만 하면 그 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될 때, 물건의 기능은 예전처럼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형태만을 봐서는 그 물건의 기능을 짐작할 수 없게 된다. 이제 벽에 붙어 있는 디스플레이 스크린은 우리의 순간적인 기분에 따라서 시계도 되고, 텔레비전이나 증권 시세표도 될 수 있으며, 사랑하는 사람의 초상으로 둔갑할 수도 있고, 때론 어린아이를 돌보는 모니터로 그 역할을 계속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손바닥 크기의 포켓용 컴퓨터 장치 하나가 휴대전화, 호출기, PDA(Personal Digital Assistant), 텔레비전 리모콘의 역할을 동시에 할 것이다. 간단한 플라스틱 사각형 카드는 신용카드, 디지털 현금으로 채운 지갑, 현관열쇠의 역할을 할 수 있다.

3.
한편, 빠른 전자배달에 덧붙여 시간대 차이를 함께 활용한다면 효율적인 새로운 형태의 24시간 교대작업이 가능해질 것이다. 한 예를 들어 국제적인 건축 및 엔지니어링 설계기업은 약 8시간의 시간대 차이가 나는 도시들에다 사무실들을 설치하고는 캐드 파일을 이 사무실에서 저 사무실로 전자적으로 전달하면서 전세계로 계속 빙빙 돌리게 할 수 있다. 이 같은 시스템은 때로는 특정 지역에 혜택이 가도록 조직될 수도 있다. 런던의 소호(Soho) 지역-영화 및 비디오의 가공생산 기술인력들의 온실-은 미국 캘리포니아의 할리우드와 반나절 떨어져 있는 곳에 위치한 행운의 입지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소호에서는 캘리포니아에서 그날 촬영이 끝난 필름들을 전자상으로 배달받아서, 런던의 정상적 근무시간 동안에 그것을 가공한 후, 캘리포니아에서 다음날 촬영이 시작되기 전에 되돌려 보낼 수가 있다.

4.
짧은 시간 동안만 웹을 돌아다녀보아도, 매력적이고 재미있는 원격 로봇 장난감과 기술적 설비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야후에서는 이것을 ‘네트와 연결된 흥미 잇는 장치들( Interesting Devices Connected to the Net)’로 분류한다.] 이 단락을 쓰면서, 나는 여러분들이 다음과 같은 것을 할 수 있는-또는 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약속하고 있는, 혹은 한때 할 수 있었던-사이트들을 발견했다. 그 사이트들에는 모래가 채워진 유리상자 속에 묻힌 물건을 파내는 것, 다양한 종류의 실험실 장비들을 제어하는 것, 여러 장소에서 비디오 카메라들을 작동시키고 비추도록 하는 것, 독일에 있는 모형 기차를 작동시키고 이것이 움직이는 것을 지켜보는 것, 멀리 떨어져 있는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한 전구들을 켜는 것, 여러 개의 자동 망원경들을 작동시키는 것, 서호주 대학(University of Western Australia)에 있는 기계 팔을 가지고 주위의 블록을 이동시키는 것, 진짜 물감과 붓을 가지고 그림을 그리는 것, 심지어 멀리서 토스트를 굽는 것까지 있다.

5.
비슷한 예로, 차고나 주차장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주차하고 있는 당신의 자동차는 쓸모없이 묶여 있는 자원인 셈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정교하게 전자적으로 관리되는 자동차임대 공급서비스의 경우에는 언제 어디서나 자동차가 필요할 때, 당신이 원하는 바로 그 차종-어떤 때는 미니밴이 될 수도 있고 또는 두 좌석만 있는 스포츠카가 될 수도 있다-을 제공할 수 있다. 이 같은 방식으로 전체 차량을 한꺼번에 더 슬기롭게 관리하는 것이 각각의 개인 소유 자동차를 개별적으로 더 효율적으로 운영하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훨씬 이득이 많을 것이다.

by William J. Mitchell
강현수 옮김
,
1.
그렇다면 국내 디자인산업의 상황은 어떠한가요? 혹시 청담동 패션거리와 용산 전자상가, 프라다와 무지, 백화점 명품매장과 대형 할인점 사이 어딘가에서 엉거주춤하게 헤매다가 결국 공공디자인사업을 발주하는 행정기관들로 발길을 돌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혹시 영세 하청업체로 전락한 중소기업들에 대한 소문을 뒤로 한 채, 극소수 대기업의 성공사례를 자신의 것인 양 우쭐해 하며 헛된 자존심으로 대륙의 하이얼을 비웃고 스티브 잡스의 맥 월드만 쳐다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2.
드로흐 길드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들의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드로흐 초기 멤버의 일부가 디자인 아카데미 아인트호벤(Design Academy Eindhoven)을 근거지로 삼아 드로흐 미니미 또는 네덜란드풍 디자인 자영업자들을 육성하고 있는 것을 들 수 있다. 이 학교의 디자인 교육 방식이 개념의 생산 못지않게 그것의 ‘실행’을 강조한다는 면에서, 이 학교가 배출하려는 디자이너의 모습은 소수 권력자에 봉사하는 중세의 수공업 장인에 가까워 보이기도 한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이들의 시도는 비록 디자이너의 지위와 역할의 시대적인 변화를 반영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분명 ‘퇴행’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하지만 바로 이런 점으로 인해 이 학교는 다른 유명 디자인학교들과 분명하게 구분된다.
대개의 디자인 학교들은 디자이너를 기업조직의 일원으로 상정하기 때문에 ‘실행’을 학교 밖에서 일어나는 일로 방관하는 경향이 있으며, ‘양산’을 디자이너의 유일한 덕목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이를 가능케 하는 기업의 존재에 대해 과도할 정도로 수동적인 자세를 보이는 경향이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이 학교의 교육 방향은 전통적인 디자인 커리큘럼에서 벗어난 ‘진보’로 이해될 수도 있다.

3.
아이디오의 차업자 빌 모그리지(Bill moggridge)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동아시아의 고객의 경우, 호경기에는 외부용역을 많이 주기 때문에 우리가 일을 할 기회가 많지만, 불경기에는 외부용역을 끊고 인하우스 디자이너들이 자체적으로 일을 처리한다. 반대로 서구의 고객의 경우, 호경기에는 인하우스 디자이너들이 자체적으로 일을 처리하지만, 불경기에는 외부용역을 많이 준다. 왜냐하면 인하우스 디자이너들을 대부분 해고한 이후이기 때문이다.”

4.
디자인이 완전한 관람의 대상으로 자리매김하는 순간, 작품 본연의 기능조차 심미적 대상으로 전환된다. 그렇게 디자인 아트는 보다 근본적인 ‘탈기능’의 국면으로 진입하게 되는데, 그것은 앉을 수 없는 의자라는 뜻이 아니라, 앉을 수 있는 의자에 앉지 않는다는 의미에 가깝다. 디자인 아트는 디자인을 감상의 대상으로 전환하며, ‘시각’의 승리를 선언하는 것처럼 보인다.

5.
2006년 런던의 어느 날 아침. 트라팔가 광장에 500개의 의자들이 등장했다. 이 의자들은 발포 폴리스틸렌 그룹의 협찬으로 톰 딕슨이 만들어낸 것들로, 부지런하기만 하다면 누구나 그의 의자를 공짜로 집어 갈 수 있었다. 그렇게 총 500개의 의자는 정확히 7분 만에 모두 동이 났다. 그리고 이듬해, 뉴욕 모스(Moss) 갤러리에서는 이 공짜 의자의 구리 도금판 ‘CU29’ 8점이, 차례차례 3만 달러 이상의 가격에 팔려나갔다. 무료 의자와 한정판 의자를 가르는 경계는 순도 99퍼센트의 얇은 구리 피막에 불과했다. 디자인 민주주의와 디자인 아트, 혹은 대중주의와 엘리트주의를 가르는 경계란 이처럼 얇았던 것이다.

6.
1924년 10월 1일 늦은 오후, 르 코르뷔지에는 파리의 샹젤리제에서 다소 반(反)기술적이고 벤야민적인 방식으로 텅 빈 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그런데 오후 6시가 되자, 갑자기 사방에서 자동차들이 썰물처럼 빠져나와 이 겁먹은 스위스 출신 산책자에게 돌진했다. 그는 가까스로 가로수가 우거진 보도로 몸을 피한 후, 생각에 잠겼다.
그는 생각하고 또 생각한 끝에 비로소 다음과 같은 유명한 결론에 도달했다.
자동차는 수 세기에 걸쳐 형성된 도시계획의 토대를 뒤흔들었다. 그래서 나는 푸조, 시트로엥, 부아쟁(당대의 유명한 자동차 제조업체. 푸조와 시트로엥은 합병하여 여전히 영업 중이다)의 최고 관리자를 만나 이렇게 말했다. “자동차가 대도시를 살해했으니 이제 자동차가 대도시를 구해야 합니다. 나는 기계시대에 의해 돌이킬 수 없이 변모한 삶의 조건에 부합하는 새로운 도시 구조를 창조하려 합니다. 신사 여러분, 자동차 기반의 파리 재개발 계획을 후원하지 않겠습니까?”

7.
흔히 헤겔의 말이라고 인용되는데, 모든 거대한 세계-역사적 사실은 적어도 두 번 반복된다. 이에 대한 칼 마르크스의 부연 역시 유명하다: “첫 번째는 비극으로, 두 번째는 소극으로.”

,
1.
오래된 디자인계의 금언에 따르면, 사람들에게 화병을 디자인하라고 말할 때와 꽃을 담을 물건을 만들라고 할 때의 결과물은 달라진다. 작은 작업에만 집중해버리면 화병만 줄곧 디자인할 뿐 벽에 걸 수 있는 작은 장식용 정원은 절대로 생각해내지 못한다.

2.
스타벅스 체인점은 고객들이 주문하는 공간과 주문한 음료수를 받는 공간을 구분하고, 사람들이 음료수에 크림이나 설탕을 넣을 공간을 다시 분리함으로써 공간을 훌륭하게 활용했다. 이를 일반적인 패스트푸드 레스토랑의 어수선한 카운터와 비교해보자.

3.
언젠가는 음성 메시지가 도착한 후 시간이 지나면 점점 온도가 내려가서 차가워지는 기능도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4.
복잡한 도시에 살면서 모든 사람이 차를 타고 다니기보다는 차를 공유하거나 각자 필요할 때만 사용한다면 어떨까? 이 질문이 집카Zipcar와 같은 자동차 공유 서비스를 탄생시켰다. 사용자들은 이 서비스를 이용해 일정 시간 동안 차를 사용하고 이를 다시 공용 주차장에 돌려주어 다른 사람들이 그 차를 사용할 수 있게 한다.

5.
나는 할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지포 라이터를 갖고 있다. 별다른 사고가 없는 한 지포 라이터는 언제나 같을 것이다. 그것은 실체가 있으므로 쉽게 만지고, 사용하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서비스, 특히 변화가 잦은 디지털 서비스는 그렇지 않다. 그리고 사실 고객은 서비스를 쉽게 바꿀 수 있다. 만약 이베이보다 나은 경매 서비스가 나온다면, 사용자들은 그리로 건너갈 것이다. 설사 우리 할아버지가 이베이를 쓰셨대도, 내가 더 나은 서비스로 옮겨가는 걸 막을 수는 없다. 하지만 나는 할아버지의 지포 라이터를 더 좋은 라이터로 바꾸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그 라이터에 애착이 있다. 확실히 그건 감정적이지만, 인간은 원래 감정적 존재이고 항상 논리적 결정을 하지는 않는다. 요점은 사람들은 고유한 생물학적 배선 덕에 무형의 서비스보다는 사물에 더 감정적 애착을 갖기 쉽다는 것이다.

6.
다가올 10년 안에, 인터넷은 컴퓨터 모니터를 벗어나 우리 주변을 둘러싼 모든 오브젝트와 건물들로 옮겨갈 것이다. 마이크로프로세서, 센서, 무선식별RFID 태그가 일상의 물건에 내장되고 네트웍으로 연결되어 부르스 스털링이 “사물들의 인터넷”이라 부른 세상이 열릴 것이다. 그때가 되면 전자장치가 우리 삶을 바꿔놓았듯이, 더는 인터넷을 특정한 목적지나 장소로 생각하지 않게 될 것이다.

Daniel Saffer
이수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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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is imperative to develop your own vocabulary of your own language - a language that attempts to be as objective as possible, knowing very well that even objectivity is subjective.
I love systems and despise happenstance. I love ambiguity because, for me, ambiguity means plurality of meanings. I love contradiction because it keeps things moving, preventing them from assuming a frozen meaning, or becoming a monument to immobility.
As much as I love things in flux, I love them within a frame of reference - a consistent reassurance that at least and at last I am the one responsible for every detail.
 
And that is why I love Design.

Massimo Vignelli
,
1.
따라서 약간의 과장을 보탠다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지각하고 인지하고 소통하고 행위하는 것은 누군가가 디자인한 인터페이스’들’을 통해서라고 말이다.

2.
패퍼트는 특정 언어를 배우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그 언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어린이가 수학의 언어를 습득하는 가장 좋은 방법 역시 이와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컴퓨터가 어린이와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그런 환경이 갖춰진다면 어떨까?
패퍼트는 이런 질문을 바탕으로 프랑스의 교육심리학자 장 피아제의 가르침에 따라, 어린이의 자율적인 학습 활동을 돕는 기계 친구로 컴퓨터 환경을 구성하려 했다. 패퍼트가 ‘수학나라’로 명명한 이 환경에서 어린이와 컴퓨터 사이에서 교감의 가교 역할을 하는 핵심 요소는, ‘터틀turtle’이라는 그림 그리는 로봇이었다. 어린이들은 터틀을 처음 대하고 난 뒤 얼마 동안은 그저 원격 조정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지만,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간단한 수학 공식을 활용해 LOGO 언어로 프로그램을 짜서 터틀에게 도형 그림을 그리도록 지시했다. 어린이들은 터틀을 매개로 컴퓨터와의 정서적 관계를 강화하면서, 수학의 논리와도 친숙해질 수 있었다.

3.
이런 논의를 종합해보면, 투시도법에 기원한 디자인 교육의 역사적 맥락을 좀 더 정교하게 고찰함과 동시에 다양한 모델링 인터페이스와 결합할 수 있는 새로운 디자인 사고와 조형 논리의 개발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컴퓨터의 모델링 인터페이스가 투시도법 기반의 그림 그리기를 완전히 대체할 것이라고 섣불리 결론 내릴 필요는 없다. 이 두 가지 모델링 인터페이스의 관계를 배타적인 것으로 설정하는 한, 이에 대한 논의는 양자택일의 소모적인 논쟁으로 귀결될 뿐이다. 다만 모델링 인터페이스가 다양화, 복수화됨에 따라 그것과 관계 맺는 디자인 사고나 조형 논리 역시 다양화, 복수화될 것이라고 추론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4.
스크린은 그 광물성 재료의 이물감 때문에 텔레비전 본체의 조형 질서에 통합되기 어려운 암초다. 하지만 역으로 스크린에게 있어 본체의 외형은 시청자가 몰입의 문턱을 넘어서는 데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달리 말하자면 본체의 외형에게 스크린은 결핍이며, 스크린에게 본체의 외형은 잉여인 것이다. 자누소와 자퍼는 이 결핍과 잉여의 비대칭적 관계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한 가지 타협안을 제시한다. 그것은 스크린이 수다를 떨 때와 침묵할 때, 즉 온•오프의 두 가지 경우를 분리해 각각에 맞게 제 역할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텔레비전은 전자의 경우에는 순수한 스크린으로, 후자의 경우에는 블랙박스의 미니멀한 오브제로 표현되었다. 브리온베가의 텔레비전은 ‘지킬 오브제’와 ‘하이드 스크린’이라는 1물 2역을 떠맡은 셈이었다. 시각적 상징화보다는 상화의 연출에 주목하는 것이 자누소와 자퍼가 취한 접근법의 요체였다.

5.
<비디오드롬Videodrome>

6.
유비쿼터스 컴퓨팅과 앰비언트 테크놀로지를 콘셉트의 밑거름으로 삼은 필립스사의 최근 디자인 프로젝트 <새로운 일상The New Everyday>은 ‘사라짐의 미학’을 생존의 핵심 전략으로 삼는다. 필립스사의 디자인 연구소 소장인 스테파노 마르자노Stefano Marzano는 이 프로젝트를 발표하기 몇 년 전에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나는 미래의 가정이 오늘날의 가정보다 과거의 가정에 보다 가깝지 않을까 예측한다. 오늘날 가정을 채우고 있는 블랙박스들은 사라질 것이며, 의자, 탁자, 침대처럼 좀 더 오랜 역사를 지닌 사물들이 무대 위에 오르게 될 것이다. 이러한 사물들은 태곳적부터 특정한 형태로 우리와 함께 생활해왔으며, 그 기능은 나름의 본질적인 형식을 갖추고 있다. 우리는 그 사물들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블랙박스의 사물들이 수행하는 기능(엔터테인먼트, 커뮤니케이션, 노동)은 시간을 초월해 존재할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최종적 형태는 아직 성취되지 못했다. 그것들은 좀 더 중요한 사물들, 즉 벽, 책장, 의자, 접시와 같은 사물들과 자유롭게 결합할 수 있다.
이런 입장은 <새로운 일상>에서 구체적인 모습을 갖추게 된다. 이 프로젝트에서 가전제품들은 박스 형태를 벗어던진 후, 눈에 거슬리지 않게 흔적도 없이 벽면으로 사라지거나 가구 오브제의 모양새를 흉내 내며 방 모퉁이에 조용히 서 있다. 즉 “보이지 않는 컴퓨터”라는 도널드 노먼의 시나리오와 유사한 노선을 밟으며, 가까운 미래에는 가전제품의 기존 모습이 가정의 풍경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예측하는 것이다.

7.
그렇다면 진도구란 무엇인가? <101가지 쓸모없는 일본의 발명품: 진도구의 예술>은 다음과 같이 진도구의 십계명을 정의한다.
1. 진도구는 실제적인 사용을 위한 것이 아니다.
2. 진도구는 분명히 존재한다.
3. 모든 진도구는 근본적으로 무정부주의적이다.
4. 진도구는 일상생활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
5. 진도구는 판매를 위한 상품이 아니다.
6. 진도구 제작에 있어 유머만이 유일한 동기는 아니다.
7. 진도구는 선전하거나 선동하지 않는다.
8. 진도구는 결코 금기가 아니다.
9. 진도구는 한 개인의 소유가 아니다.
10. 진도구는 선입견을 갖지 않는다.
위의 십계명이 암시하듯이 진도구는 순수외관의 정반대편에서 ‘순수기능’에 강박적으로 집착한다. 여기서 순수기능이란 실제적인 사용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잉여의 기능을 의미한다. 코를 풀기 쉽도록 머리 위에 걸고 다닐 수 있는 휴지 걸이, 막 끓인 라면을 식혀가면서 먹기 위해 선풍기를 장착한 젓가락, 안전한 보행을 위해 언제든지 차도에 깔 수 있는 두루마리식 횡단보도처럼 기발하지만 쓸모없어 보이는 아이디어들이 자주 언급되는 진도구의 대표적 사례들이다. 이것들이 암시하듯이, 진도구는 가능한 범위 안에서 가장 복잡하고 특수한 방식으로 필요와 기능의 인간중심적인 방정식을 내파해버린다.

8.
영국의 디자인 역사가 페니 스파크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독일은 과학의 이름으로 디자인을 팔며, 이탈리아는 예술의 이름으로, 북구는 공예품의 이름으로 디자인을 팔고, 미국은 비즈니스의 이름으로 디자인을 판다.”

9.
흥미로운 것은 이런 고난의 행보 덕분인지, 이 세대의 디자이너들 중 일부는 지난 세기에 찾아보기 힘들었던, 차라리 현대 미술과 호환될 법한 기이한 실험들을 진행하면서 자기 비평적인 태도로 디자인의 20세기적 신화를 해체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점이다. 혹시 지속적인 위기가 이들에게 미적 실험성과 조우할 수 있는 자율성의 공간을 일시적으로나마 개방해준 것일까?
물론 20세기의 디자인 역사를 훑어보면, 디자인이 예술과의 경계를 허물고자 했던 시도를 발견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지금의 실험적 시도는 이전과는 무척 다르다. 이전의 시도는 디자인 산업의 호황에 동승해, 상당 부분 낭만주의 예술관에 의지하면서 디자이너 자신의 자기표현 수단으로서 새로운 조형의 가능성을 여유롭게 탐색하는 것이었다. 반면, 최근의 시도들은 디자인 산업의 완연한 하향세에 따른 무기력증의 발현으로서, 디자인 산업의 구조 변동과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확산이 빚어낸 과도기의 틈새 공간으로 비집고 들어가, 일상의 문화적 경험을 바탕으로 기이한 인터페이스들의 복마전을 펼쳐 보인다.

10.
이들과는 달리 약간 모호한 정치적 태도를 견지하는 피터 앨런과 칼라 머레이는 <스킨테틱> 프로젝트를 통해 2020년의 미래에 거대 기업의 브랜드가 어떤 모습으로 변모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그리고 마스터 카드, 나이키, 샤넬을 사례 연구의 대상으로 삼아, 이 기업의 브랜드 전략이 유전공학이나 성형외과 기술과 결합될 가능성을 예측한다. 이들이 제안하는 마스터 카드와 나이키의 디자인 콘셉트는 1990년대의 사이버펑크 소설들이 묘사했던 미래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플라스틱 신용카드를 디지털 DNA로 대체해 손톱에 이식한다거나, 충격 완화를 위한 공기 펌프를 발바닥에 이식한다는 식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이런 질문도 가능해 보인다. 유명 여배우들이 들고 다니는 명품 핸드백을 신용카드로 살 수 있다면, 그 여배우의 코를 구입할 수는 없는 것일까? 더 나아가, 성형시술을 받는 김에 샤넬의 로고 패턴을 피부 조직에 이식받고 ‘명품’의 전신을 렌더링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박해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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