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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하는 것이 때로는 증오하는 것만큼이나 위험할 수 있다. 유럽과 북미의 자연 공원을 찾는 사람들은 새끼 사슴을 자주 만나게 된다. 어미가 먼 곳에 있지 않음에도, 그 새끼 사슴은 외롭고 쓸쓸해 보이기가 십상이다. 산보객들은 측은한 마음도 들고, 플러시 천으로 된 인형처럼 마냥 순하게만 보이는 동물에 가까이 다가서는 것이 기쁘기도 해서, 그 새끼 사슴을 쓰다듬으려고 한다. 그 손짓에는 공격적인 의도가 전혀 없고, 그렇게 사람이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면 새끼 사슴은 더욱 온순한 모습을 보이기까지 한다. 그런데, 그 접촉이 새끼 사슴에게는 치명적인 행위가 된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처음 몇 주 동안, 어미 사슴은 오로지 냄새를 통해서만 자기 새끼를 알아본다. 그 손길이 아무리 다정스러웠다 해도, 일단 사람의 손길이 닿고 나면 새끼 사슴의 몸에 사람 냄새가 배어든다. 별로 진하지 않아도 오염성이 강한 그 냄새는 새끼 사슴의 신분 증명서를 쓸모없게 만들어 버린다. 새끼 사슴은 가족을 다시 만나자마자 버림받는 신세가 된다. 어떤 암사슴도 다시는 그를 받아 주지 않기 때문에, 새끼 사슴은 굷어 죽는 형벌에 처해진 거나 다름이 없다.
    죽음을 불러오는 그런 위험한 애정 표시를 일컬어 <밤비 신드롬> 또는 <월트 디즈니 신드롬>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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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1년에 미국의 아쉬라는 교수는 어떤 실험을 위해 자기방에 일곱 사람을 모았다. 그는 방에 모인 사람들에게 자기가 그들을 상대로 지각에 관한 실험을 할 거라고 알려 주었다. 그런데 그 일곱명 중에서 진짜 실험 대상이 되고 있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고, 나머지 여섯 명은 돈을 받고 교수를 도와주는 사람이었다. 그 보조자들의 역할은 진짜 피실험자가 실수를 하도록 유도하는 것이었다.
    그 실험이 이루어지는 방식은 이러했다. 피실험자가 마주보고 있는 벽에 직선 두개를 그려 놓는다. 직선 하나는 길이가 25센티미터, 다른 하나는 30센티미터이다. 두 직선은 나란하기 때문에 30 센티미터짜리가 더 길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명백하다. 아쉬 교수는 방에 모인 사람들 하나하나에게 어느 직선이 더 긴가 하고 둡는다. 여섯 명의 보조자들은 한결같이 25센티미터 짜리가 더 길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나서 마지막으로 진짜 피실험자에게 묻는다.
    그런 식으로 실험을 한 결과, 보조자들은 25센티미터짜리의 직선이  더 길다고 응답하는 경우가 60%에 달하였다. 또, 30센티미터짜리가 더 길다고 응답한 사람들도, 여섯 보조자들이 비웃으며 놀려대면, 그 중의 30%는 다수의 기세에 눌려 처음의 응답을 번복하였다.
    아쉬 교수는 대학생과 교수 1백여 명을 상대로 같은 실험을 했다. 남의 말을 쉽게 밎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는 사람들을 실험 대상으로 삼아 본 거였다. 그 결과는 그들 중의 90%가 25센티미터짜리 직선이 더 길다고 응답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5센티미터짜리가 더 길다고 대답하는 사람들에게 생각을 바꿀 기회를 주느라고 아쉬 교수가 같은 질문을 여러 차례 되풀이하면, 많은 사람들은 뻔한 걸 왜 자꾸 묻는지 모르겠다는 듯한 기색을 보이며 자기 응답을 고수하였다.
    가장 놀라운 것은 피실험자들에게 그 실험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를 밝히면서 다른 여섯 명은 교수와 미리 짜고 실험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피실험자들에게 알려주어도, 그들 중의 10%는 여전히 25센티미터짜리 직선이 더 길다고 고집을 부린다는 거였다. 또 어쩔 수 없이 자기들의 실수를 받아들인 사람들도 남들이 다 그러기에 자기도 따라 했다는 것을 순순히 인정하기보다는, 자기들의 시력이나 관찰 각도를 문제 삼으면서 갖가지 변명을 늘어놓더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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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한평생을 살면서 25년을 잠으로 보낸다. 그럼에도 우리는 수면의 양과 질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진정한 심수(深睡), 즉 우리의 피로를 풀어 주고 원기를 회복시켜 주는 깊은 잠을 자는 데 필요한 시간은 하룻밤에 한시간밖에 되지 않는다. 그 깊은 잠은 15분짜리의 작은 구성 단위로 나뉘어져 한 시간 반 간격으로 노래의 후렴처럼 되풀이된다.
    간혹 어떤 이들은 열 시간을 내리 자고서도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한 탓에 피로가 전혀 풀리지 않은 채로 깨어난다.
    그와 반대로, 자리에 눕자마자 깊은 잠에 떨어지는 방법을 알게 되면, 하루에 한 시간만 자면서도 그 시간을 온전한 원기 회복의 시간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어떻게 하면 그런 식으로 수면을 통제할 수 있을까?
    먼저 자기의 수면 사이클을 알아내야 한다. 그것을 알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예를 들어, 저녁 무렵에 나타나는 갑작스런 노곤함이 한 시간 반 간격으로 다시 찾아온다는 점에 유의하면서 그 시각을 분 단위까지 기록하면 된다. 만일 저녁 6시 36분에 노곤함을 느꺘다면 다음의 피로감이 찾아오는 시각은 아마도 밤 8시 6분, 9시 36분, 11시 6분 등이 될 것이다. 바로 그시각에 심수 열차가 지나갈 것이므로 때를 놓치지 말고 열차에 올라타야 한다.
    그 순간에 맞추어 잠자리에 들었다가 자명종을 사용해서라도 반드시 세 시간 후에 깨어나는 버릇을 들이면, 우리의 뇌는 차츰차츰 수면의 단계를 압축해서 중요한 부분만을 유지하는 것에 길들여진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아주 적게 자고도 피로를 완전히 풀고 개운한 몸으로 일어날 수 있게 된다.
    아마도 언젠가는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수면을 통제하는 방법을 가르치게 될 날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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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고래는 수수께끼 같은 동물이다. 포유류 가운데서도 돌고래는 몸집에 비해 뇌의 부피가 가장 큰 편에 속한다. 침팬지의 뇌 무게가 보통 3백75그램이고, 사람의 뇌 무게가 1천4백50그램인데 비해, 돌고래의 것은 1천7백그램이다. 그런 정도의 뇌를 가지고 있으니, 돌고래는 기호를 이해하고 언어를 만들기에 충분한 능력이 있는 게 확실하다. 그럼에도 돌고래는 그 지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고작해야 동물원이나 수족관에서 벌이는 쇼에 출연하여 사람들의 놀이를 흉내내거나 서커스 묘기를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그들의 지능은 정말로 스스로에게 아무런 도움을 못 주는 것일까?
     돌고래는 포유강 고래목(目)에 속한다. 한마디로 바다에 사는 포유류 동물이다. 그들도 마치 우리처럼 공기를 들이마시고, 암컷들은 새끼에게 젖을 먹이며, 알을 낳지 않고 임신과 출산을 한다. 돌고래의 조상은 옛날에 육지에 살았다. 그들에겐 다리가 있었고, 땅 위를 걷고 뛰어다녔다. 그들은 아마도 악어나 바다표범과 비슷했을 것이다. 어쨌든 그들은 땅에서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무슨 까닭에서인지, 그들은 물 속으로 되돌아갔다. 마치 육지 생활에 염증을 느끼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우리처럼 물에서 나와 육지에 잘 적응해 가더니, 그래도 역시 물이 더 살기 좋다고 생각했는지 훌쩍 떠나 버린 것이다.
     1천7백 그램에 달하는 커다란 뇌를 가진 그들이 바다로 돌아가지 않고 육지에 남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것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들의 우리의 경쟁자나 선구자가 되었을 것이고, 전자보다는 후자가 되었을 가능성이 더 많다.
     그런데 돌고래는 왜 바다를 택했을까?
     바다는 확실히 육지보다 유리한 점을 지니고 있다. 육지에서 우리는 땅바닥에 붙어 살지만, 바다에서는 3차원 속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 또 바다에서는 옷도 필요 없고 집과 난방 설비도 필요치 않다. 바다에는 먹이도 풍부하다. 돌고래가 정어리 떼에 다가가는 것은 우리가 슈퍼마켓에 가는 것과 같다. 단지 돌고래는 공짜로 먹이를 구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돌고래의 뼈대를 조사해 보면, 지느러미 안에 길쭉한 손가락뼈가 아직 들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육지 생활의 마지막 흔적이다. 그 부분의 변화가 돌고래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는지도 모른다. 손이 지느러미로 바뀜으로써 돌고래는 물 속에서 대단히 빠른 속도로 움직일 수 있었겠지만, 그 대신 더 이상 도구를 만들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우리 기관의 능력을 보완하기 위해 도구를 만들어내는데 그토록 열을 올렸던 것은, 우리 환경이 우리에게 그다지 적합하지 않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일 수도 있다. 물 속에서 행복을 되찾은 돌고래는 자동차나 텔레비전, 총, 컴퓨터 따위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언어의 필요성까지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돌고래는 자기들 고유의 언어를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시킨 듯 하다. 그들의 언어는 소리를 통해 교신하는 음향 언어이다. 돌고래가  내는 소리는 음역이 대단히 넓다. 사람의 음성 언어는 주파수 1백 헤르츠에서 5천 헤르츠 사이에서 소통되지만, 돌고래의 교신은 7천 헤르츠에서 17만 헤르츠에 이르는 넓은 범위에서 이루어진다. 돌고래의 음향 언어는 아주 풍부한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나자렛 베이 커뮤니케이션 연구소 소장인 존 릴리 박사의 견해에 따르면, 돌고래들은 오래 전부터 우리와 교신하기를 갈망해 온 듯하다고 한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해변에 있는 사람들과 우리 선박들에게 다가와서는, 마치 우리에게 알려 줄 게 있다는 듯이 펄쩍 뛰어오르기도 하며, 어떤 몸짓을 하기도 하고, 신호를 보내기도 한다. <돌고래들은 우리가 자기들을 이해하지 못할 때면, 이따금 역정을 내기도 하는 것 같다>고 존 릴리 박사는 말한다. 우리에게 뭔가를 <가르치고 싶어하는> 그런 행동은 동물 세계 전체를 통틀어 오직 돌고래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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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은 지금으로부터 꼭 7억 년 전에 출현했다. 40억 년 전부터 그때에 이르기까지 생명은 단세포에 한정되어 있었다. 단세포로 이루어진 생명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 똑같은 형태로 무한히 재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산호초에서 영원히 죽지 않는 단세포 체제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그렇게 모든 생명이 죽음을 모르고 살아가던 어느 날, 두 세포가 만나서 서로 이야기를 나눈 다음, 서로 도우며 함께 생명활동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에따라 다세포의 생명 형태가 나타났고, 그와 동시에 죽음도 생겨났다. 다세포 생물의 출현과 죽음의 시작은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일까?
     두 세포가 결합하자면 서로간의 소통이 불가피하고, 그 소통의 결과 두 세포는 더욱 효율적인 생명 활동을 위하여 자기들의 일을 분담하게 된다. 예를 들어, 두 세포가 다 영양물을 소화하는 작용을 하기보다는 한 세포는 소화를 맡고 다른 세포는 영양물을 찾는 식으로 역할 분담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그 후로, 세포들은 점점 더큰 규모로 결합하게 되었고 각 세포의 전문화가 더욱 진전되었다. 세포들의 전문화가 진전 될수록 각각의 세포는 더욱 허약해졌다. 그 허약성이 갈수로 심화되어 마침내 세포는 본래의 불멸성을 잃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죽음이 생겨났다.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동물들의 대부분은 고도의 전문성을 지닌 세포들의 결합체이다. 그 세포들은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며 함께 작용한다. 우리 눈의 세포들은 간의 세포들과 아주 다르다. 눈의 세포들은 어떤 따끈따끈한 음식을 발견하게 되면 서둘러 그 사실을 간의 세포들에게 알려준다. 그러면 간의 세포들은 음식물이 입 안에 들어오기도 전에 즉시 담즙을 분비하기 시작한다. 우리 몸을 이루는 세포들은 모두가 전문적인 기능을 수행하면서 서로 소통한다. 그리고 그 세포들은 언젠가 죽게 되어있다.
     죽음의 필요성은 다른 관점에서도 설명될 수 있다. 죽음은 종들간의 균형을 확보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 만일 영원히 죽지 않는 다세포 종이 존재하게 된다면 그 종의 세포들은 전문화를 계속하여 모든 문제를 해결하게 될 것이고, 생명활동이 너무나 효율적인 나머지 다른 모든 생명 형태의 존속을 위태롭게 만들 것이다.
     암세포가 활동하는 방식을 생각해 보면 그 점이 더욱 분명해진다. 분열 능력이 큰 암세포는 다른 세포들이 말리거나 말거나 막무가내로 분열을 계속한다. 암세포가 유기체 전체를 죽이게 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암세포는 다른 사람들의 말은 전혀 듣지 않고 언제나 혼자서만 지껄이는 사람들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암세포는 자폐증에 걸린 위험한 세포이다. 그것은 다른 세포들을 고려하지 않고 불멸성을 헛되이 추구하면서 끊임없이 증식하다가 마침내는 자기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을 죽여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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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날에는 정보를 대중으로부터 차단하기 위해 단순하고 노골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체제에 도전하는 서적들을 간행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 그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검열의 양상이 사뭇 달라졌다. 이제는 정보를 차단하지 않고 정보를 범람시킴으로써 검열을 한다. 그러나 이 방법이 오히려 한층 효과적이다.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무의미한 정보들 속에서 사람들은 정작 중요한 정보가 어떤 것인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텔레비전 채널이 늘어나고, 프랑스에서만도 한 달에 수천종의 소설이 쏟아져 나오며, 온갖 종류의 비슷한 음악들이 어느 곳에나 퍼져 나가는 상황에서 혁신적인 움직임이란 나타날 수 없다. 설령 새로운 움직임이 출현한다 해도 대량 생산되는 정보들 속에 묻혀 버리고 만다.
     결국 이 거대한 진창 속에서는 대중 매체가 만들어 낸 상품들만이 살아 남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 상품들이 가장 인기가 있다는 점 때문에 마음 놓고 소비한다. 텔레비전에서는 <수려한 육체를 지닌> 사람들이 단순한 선율에 담아 제시하는 사랑 노래들이 판친다.
     과잉은 창조를 익사시키고 비평은 마땅히 이 예술적 범람을 걸러 낼 책임을 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정보의 홍수 앞에 주눅이 들어 버린다. 이 모든 것이 빚어 내는 결과는 자명하다. 기성 체제에 도전하는 새로운 것이 전혀 나타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결국 그토록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음에도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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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기는 생후 8개월이 되면 특유의 불안감을 경험하게 된다. 소아과 의사들은 그것을 <아기의 애도(哀悼)>라고 부른다. 어머니가 자기 곁을 떠날 때마다 아이는 어머니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어머니가 죽었다고 믿는 아이는 울음을 터뜨리고 심한 불안감을 드러낸다. 어머니가 돌아와도 아기는 어머니가 또 떠날 것을 걱정하며 다시 불안감에 빠진다.
     그 나이에 아기는 세상에 자기가 통제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기의 애도>는 자기가 세계로부터 독립되어 있다는 것을 의식함으로써 생기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내>가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과 다르다는 사실은 참을 수 없는 슬픔이다. 아기는 엄마와 자기가 떼려야 뗄 수 없이 결합되어 있는 것이 아니어서, 자기 혼자 남게 될 수도 있고, 엄마 아닌 낯선 사람들 -- 아기에겐 엄마 아닌 모든사람, 경우에 따라서는 아빠,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모두 낯선 사람일 수 있다 -- 과 관계를 맺어야 할 때도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아기가 나중에 어른이 되어 노년에 이르기까지 경험하게 될 그 밖의 많은 불안 -- 고독에 대한 두려움, 소중한 존재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 적대적인 이방인과 마주칠때의 공포 따위 -- 의 대부분은 맨처음 겪는 이 고통의 연장선 위에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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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66이 그 짐승의 이름입니다. [요한계시록]
    그런데 누가 누구에 대해서 짐승이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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