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수행적이라는 것은, 말이나 말 행위의 의미는 그것이 가리키려는 바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효과를 통해 생산된다는 것을 일컫는다. 이를테면 “A는 여자다”,”B는 흑인이다”라는 진술을 그 A와 B가 여자, 흑인에 대응한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런 진술을 통해 여자, 흑인이란 정체성을 ‘선언’하고 ‘공표’하며 ‘제정’한다는 것 등을 가리킨다. 이를테면 언어학에서 흔히 수행사the performative라고 하는 것을 설명하며 드는 예는 “이제부터 당신들은 부부임을 선언합니다”라든가 “지금부터 이 배를 한바다호라 명명합니다”같은 것이다. 물론 이 말들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어떤 효과를 생산한다. 다하고 선언하며 강요한다. 그것은 말을 지시 관계 속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효과라는 측면에서 인식하는 것이다.
2.
포스터는 소설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 세 가지 답변이 있을 수 있다면서 그에 관한 각각의 답을 내놓는다. 하나는 “잘 모르겠으나 소설은 그저 소설이죠”라고 말하는 농부나 버스 운전수의 답변. 그리고 두 번째 답변은 “나는 얘기를 좋아하지. 소설이란 얘기 아닌가. 예술 따윈 아무래도 좋으니 내겐, 아주 나쁜 취미지만, 얘기면 족하오. 얘기는 얘기다워야 하니까. 마누라도 똑같아요”라는 골프장에나 다니는 사람의 말. 마지막 세 번째는 포스터 자신의 답변인 “그렇지요. 암, 그렇지요. 소설은 얘기를 해주죠”라는 말.
세 가지 모두 소설을 이야기라고 말하지만 각자 다른 지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첫 번째 답변을 내놓는 사람은 제가 그간 읽고 들은 소설을 두고 그저 소설은 이야기이지 않겠느냐고 겸손히 말한다. 두 번째 답변은 물론 그와 딴판이다. 소설은 그저 이야기일 뿐이라고, 그게 다라고 확언한다. 세 번째는 물론 소설은 이야기지만이라며 말끝을 흐린다. 소설이 이야기라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에서 떼어내기 어려운 어떤 잉여가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포스터는 첫 번째 부류의 사람을 존경하고 그들에게 찬사를 보내지만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이 싫을 뿐 아니라 두렵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세 번째는 바로 자신이라고 고백한다.
물론 이 이야기를 디자인에 빗대어 보는 게 그렇게 억지는 아닐 것이다. 우리는 첫 번째 부류를 디자인을 소비하는 평범한 사람들이라고 가정할 수 있다. 이를테면 제품의 쓰임새와 겉모습을 들여다보면 디자인이란 그런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두 번째 부류는 흔히 ‘트렌드세터’나 ‘얼리어답터’로 자처하는 중간 계급 상층에 속한 사람들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들은 장황하고 요란스럽게, 누가 언제 만들었으며 어떤 유파와 경향에서 나온 작품인지 역설할 것이다. 좀 더 뻔뻔하다면 그것이 얼마나 비싼지를 덧붙이는 것 역시 잊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쩌면 디자인은 디자인이지만 언제나 그 이상의 것이 또한 그 안에 있다고 믿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글쎄요, 그런 게 다 디자인인 것은 맞지요”라고 말끝을 흐리는 사람들. 나는 디자인을 생각할 때 바로 그 세 번째 편에 서고 싶다. 디자이너 문화에 깊은 관심을 가진 소비자이자 학자로서 말이다. 그때 내가 생각하는 것은 포스터가 말했다고 김윤식이 전하는 그것, “멜로디라든가 진리의 인식 같은 것”에 해당되는 무엇, 그 잉여를 기대하고 예상하는 자세이자 시점이다.
서동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