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렇다면 국내 디자인산업의 상황은 어떠한가요? 혹시 청담동 패션거리와 용산 전자상가, 프라다와 무지, 백화점 명품매장과 대형 할인점 사이 어딘가에서 엉거주춤하게 헤매다가 결국 공공디자인사업을 발주하는 행정기관들로 발길을 돌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혹시 영세 하청업체로 전락한 중소기업들에 대한 소문을 뒤로 한 채, 극소수 대기업의 성공사례를 자신의 것인 양 우쭐해 하며 헛된 자존심으로 대륙의 하이얼을 비웃고 스티브 잡스의 맥 월드만 쳐다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2.
드로흐 길드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들의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드로흐 초기 멤버의 일부가 디자인 아카데미 아인트호벤(Design Academy Eindhoven)을 근거지로 삼아 드로흐 미니미 또는 네덜란드풍 디자인 자영업자들을 육성하고 있는 것을 들 수 있다. 이 학교의 디자인 교육 방식이 개념의 생산 못지않게 그것의 ‘실행’을 강조한다는 면에서, 이 학교가 배출하려는 디자이너의 모습은 소수 권력자에 봉사하는 중세의 수공업 장인에 가까워 보이기도 한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이들의 시도는 비록 디자이너의 지위와 역할의 시대적인 변화를 반영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분명 ‘퇴행’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하지만 바로 이런 점으로 인해 이 학교는 다른 유명 디자인학교들과 분명하게 구분된다.
대개의 디자인 학교들은 디자이너를 기업조직의 일원으로 상정하기 때문에 ‘실행’을 학교 밖에서 일어나는 일로 방관하는 경향이 있으며, ‘양산’을 디자이너의 유일한 덕목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이를 가능케 하는 기업의 존재에 대해 과도할 정도로 수동적인 자세를 보이는 경향이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이 학교의 교육 방향은 전통적인 디자인 커리큘럼에서 벗어난 ‘진보’로 이해될 수도 있다.

3.
아이디오의 차업자 빌 모그리지(Bill moggridge)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동아시아의 고객의 경우, 호경기에는 외부용역을 많이 주기 때문에 우리가 일을 할 기회가 많지만, 불경기에는 외부용역을 끊고 인하우스 디자이너들이 자체적으로 일을 처리한다. 반대로 서구의 고객의 경우, 호경기에는 인하우스 디자이너들이 자체적으로 일을 처리하지만, 불경기에는 외부용역을 많이 준다. 왜냐하면 인하우스 디자이너들을 대부분 해고한 이후이기 때문이다.”

4.
디자인이 완전한 관람의 대상으로 자리매김하는 순간, 작품 본연의 기능조차 심미적 대상으로 전환된다. 그렇게 디자인 아트는 보다 근본적인 ‘탈기능’의 국면으로 진입하게 되는데, 그것은 앉을 수 없는 의자라는 뜻이 아니라, 앉을 수 있는 의자에 앉지 않는다는 의미에 가깝다. 디자인 아트는 디자인을 감상의 대상으로 전환하며, ‘시각’의 승리를 선언하는 것처럼 보인다.

5.
2006년 런던의 어느 날 아침. 트라팔가 광장에 500개의 의자들이 등장했다. 이 의자들은 발포 폴리스틸렌 그룹의 협찬으로 톰 딕슨이 만들어낸 것들로, 부지런하기만 하다면 누구나 그의 의자를 공짜로 집어 갈 수 있었다. 그렇게 총 500개의 의자는 정확히 7분 만에 모두 동이 났다. 그리고 이듬해, 뉴욕 모스(Moss) 갤러리에서는 이 공짜 의자의 구리 도금판 ‘CU29’ 8점이, 차례차례 3만 달러 이상의 가격에 팔려나갔다. 무료 의자와 한정판 의자를 가르는 경계는 순도 99퍼센트의 얇은 구리 피막에 불과했다. 디자인 민주주의와 디자인 아트, 혹은 대중주의와 엘리트주의를 가르는 경계란 이처럼 얇았던 것이다.

6.
1924년 10월 1일 늦은 오후, 르 코르뷔지에는 파리의 샹젤리제에서 다소 반(反)기술적이고 벤야민적인 방식으로 텅 빈 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그런데 오후 6시가 되자, 갑자기 사방에서 자동차들이 썰물처럼 빠져나와 이 겁먹은 스위스 출신 산책자에게 돌진했다. 그는 가까스로 가로수가 우거진 보도로 몸을 피한 후, 생각에 잠겼다.
그는 생각하고 또 생각한 끝에 비로소 다음과 같은 유명한 결론에 도달했다.
자동차는 수 세기에 걸쳐 형성된 도시계획의 토대를 뒤흔들었다. 그래서 나는 푸조, 시트로엥, 부아쟁(당대의 유명한 자동차 제조업체. 푸조와 시트로엥은 합병하여 여전히 영업 중이다)의 최고 관리자를 만나 이렇게 말했다. “자동차가 대도시를 살해했으니 이제 자동차가 대도시를 구해야 합니다. 나는 기계시대에 의해 돌이킬 수 없이 변모한 삶의 조건에 부합하는 새로운 도시 구조를 창조하려 합니다. 신사 여러분, 자동차 기반의 파리 재개발 계획을 후원하지 않겠습니까?”

7.
흔히 헤겔의 말이라고 인용되는데, 모든 거대한 세계-역사적 사실은 적어도 두 번 반복된다. 이에 대한 칼 마르크스의 부연 역시 유명하다: “첫 번째는 비극으로, 두 번째는 소극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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