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의 소유물들에 시간의 흐름이 반영된다는 것은 조금도 새로운 개념이 아니다. 예전에는 우리가 보낸 삶의 흔적들이 물건에 권위를 더해주는 것 같을 때가 있었다. 이를테면 베트남전 당시 전쟁사진가들이 동남아시아의 킬링필드를 누비며 끌고 다녔고, 저격수들의 주목을 끌지 않으려고 반짝이는 로고는 테이프를 붙여 감췄으며, 검점 페인트가 벗겨져 나간 틈으로 무거운 황동 바디가 드러났던 상처투성이 낡은 검은색 니콘 카메라가 그렇다. 이런 물건들을 대할 때면 어떤 존경심이 우러난다. 장인의 솜씨가 만들어낸 이 기발한 기계 장치는 버튼을 누르면 미러가 들려올라가면서 우리가 렌즈를 통해 볼 수 있게 해준다. 이런 물건들은 지적인 면과 가치를 반영하는 순정한 물리적 존재감을 지닌다. 렌즈를 연마한 렌즈 제작자들의 솜씨와 셔터 조리개를 결정짓는 금속 날을 디자인한 엄청난 세심함이 약속해준 기능들을 수행해내며 언제까지나 지속될 물건이다. 이러한 특징들은 세월이 지나도 퇴색하지 않는다.

수십 년 동안 우리 곁에 머문 소유물들은 지나온 시간에 얽힌 우리의 경험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에 비해 지금 우리가 새로운 소유물과 맺는 관계는 무척이나 공허하다. 제품들의 매력은 물리적 접촉 우에는 남아나지 못할 외양을 토대로 만들어지고 판매된다. 유혹의 꽃이 시드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그에대한 열정은 거의 구매가 완료됨과 동시에 사그라지고 만다. 욕망은 그 물건이 헌것이 되기 훨씬 전에 희미하게 지워진다. 제품 디자인은 이제 일종의 성형수술 같은 것, 잠시 동안 미모의 환상을 만들기 위해 이마의 주름살을 감춰주는 보톡스 주사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2.

Philippe Starck

스타르크에게는 확실히 말을 다루는 특유의 방식이 있다. "이언 슈레거가 내게 뉴욕에서 100달러로 하룻밤을 지낼 수 있는 호텔방을 디자인해달라고 했다. 나는 그 일에 흠뻑 빠졌다. 뉴욕에서 100달러로 하루를 보내려면 대개는 쥐들과 함께 잘 수밖에 없다." 홍콩의 페닌술라 호텔 최상층 레스토랑의 화장실을 디자인하면서 카오룽의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통유리 앞에 소변기를 설치할 수 있는 사람이니, 재미난 일만 할 수 있다면 자신을 먹여 살리는 사람의 손도 기꺼이 깨물 준비가 되어 있을 터이다. 한 세대의 사람들에게 천재 디자이너가 되려면 에고와 잠시도 입을 다물줄 모르는 수다스러움만 있으면 된다는 인상을 심어주었다는 점만 접어둔다면 그의 무한한 자기중심성도 눈감아줄 만하다. 그리고 여전히 어디를 가든 모든 인습의 문을 습격해 우리를 해방시키는 흥미진진한 우상파괴자인 척하지 않는다면 심지어 개똥철학까지도 용서해줄 수 있을 것이다.


3.

미국의 국내 고속도로 표지판에는 고속도로용 서체인 ‘인터스테이트Interstate’체로 대문자와 소문자를 섞어서 굵고 분명히 알아볼 수 있게 지명을 표시하는데, 그렇게 하는 데는 실용적으로 분명한 목적이 있다. 비가 내릴 때 시속 70마일로 달리면서도, 목적지 도착하려면 어디로 꺾어야 하는지 분명히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터스테이트체는 그 외의 다른 여러 가지 사항에 대해서도 알려준다. 이를테면 그 폰트만 보면 단어 하나 읽지 않고서도 자신이 고속도로에 들어와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영국이 아니라 미국의 고속도로에 있다는 사실도.


4.

조정 가능한 조명 스탠드는 기술과 창의성이 결합되어야 한다. 그것을 제대로 만들어낸다면 기술적인 성취와 더불어 예술적인 야심까지도 보여주는 셈이다. 그리고 작업에 적용할 수 있는 변수들도 아주 다양하다. 기계적 구조에 관한 전반적인 문제가 있고, 손가락 끝의 힘만으로도 움직일 수 있도록 그 구조를 구현하는 방식이 있다. 또한 빛이 적당한 위치를 계속해서 비추게 해주는 구조의 문제가 있고, 광원에 공급되는 전력을 조절하는 수단도 있다. 거기에 빛의 질과 빛이 분산되고 방향을 잡고 음영을 만드는 방식도 다른 요소들만큼 중요하다. 이는 쉽게 수량화할 수 있는 요소라기 보다는 분위기의 문제다.

또 성공적으로 만들어진 조명 스탠드는 아주 오랜 기간 동안 계속 생산된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휴대전화는 6개월마다 새로운 모델에 밀려나고 캐논의 신제품 카메라 개발 주기는 2년이 채 안 된다. 새로운 자동차가 5년 이상 그 매력을 유지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고 그 정도 시간이 지나면 이미 대대적인 외장 개조에 들어간다. 64년이라는 기록적인 세월 동안 꾸준히 생산되던 폴크스바겐의 비틀도 결국에는 단종됐는데, 이미 그 무렵에는 부품이 모조리 바뀐 전혀 다른 차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비틀이 처음 구상된 때보다 10여 년 앞서 나왔던 크롬 도금한 강관 의자는 아직도 대량생산되고 있을 뿐 아니라 변함없이 현대적인 느낌을 준다. 그리고 최조의 조정 가능한 작업용 조명 스탠드인 앵글포이즈Anglepoise는 75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생산되는데, 최근 버전을 봐도 최초의 버전과 아주 유사하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5.

몰턴 자전거(미니의 서스펜션 시스템을 담당한 바로 그 앨릭스 몰턴의 창조물)는 1905년에 변속기어가 발명된 후 60년 만에 이륜자전거 디자인에서 일어난 가장 큰 변화였다. 바퀴가 작고 무게중심이 낮은 몰턴 자전거는 미니만큼 중요한 발전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역시 열정적인 추종자들의 무리를 낳았다. 

미니와 몰턴 자전거와 앵글포이즈는 모두 기술적 혁신과 형태에 대한 창의적 사고가 결합된 디자인이다. 그러나 셋 다 약자다운 면이 있었다. 다들 선구적인 위치를 차지했음에도 더 번드르르하고 더 잘 조직된 경쟁자들에게 뒤지고 만 것이다. 그러나 아이팟이나 베이크라이트로 된 1세대 다이얼식 전화기가 그랬듯이, 그 각각은 새로운 범주를 성공적으로 만들어낼 정도로 충분히 독특한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6.

영국 디자이너 재스퍼 모리슨과 도쿄의 후카사와 나오토는 이러한 전략을 바탕으로 한 디자인 접근법을 발전시켰다. 즉 특정한 물건들을 직접적으로 모방하는 게 아니라 원형들을 다시 검토하여 정제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후카사와는 계산기를 다시 이끌어냈다. 모든 휴대전화와 컴퓨터, 그리고 상당수의 손목시계들에서 그 기능을 쉽게 충족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이제 계산기는 거의 쓸모 없는 것이 되어버린 물건이다. 핵심적인 사무기기였던 것이 거의 모든 전자기기에 기본으로 깔려 있는 일반적인 기능으로 전락한 것이다. 그러나 후카사와는 그 요소들을 재설정해서 여전히 본질적으로 유용한 도구를 재창조해냈다. 기능적 측면에서 타협하기보다는 계산기의 최적의 형태로 돌아가 세부를 다시 손봄으로써 무언가 가치 있는 물건이라는 느낌을 되살려낸 것이다. 또한 소형화하느라 편리한 사용감을 희생시키는 대신 적당한 크기로 되돌려놓았다.

이 모든 이야기는 원형들만이 중요하다는 말이 아니다. 원형들의 기능적 속성들은 여전히 유동적이므로, 앞으로도 원형이 만들어질 여지가 있는 여러 다른 물건들의 범주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휴대전화가 그렇게 복잡하면서도 흥미로운 형식인 이유는 바로 끊임없이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변신하고 잡다할 정도로 갖가지 기능들을 추가하기 때문이다.


7.

취향에 대한 이케아의 접근법은 훨씬 더 근엄하다. 콘란은 적어도 결정은 우리 몫으로 남겨두었다. 이케아는 진출해 있는 모든 나라에서 자신들이 시험을 통해 확립한 틀에서 1밀리미터도 물러서지 않는 전략을 취한다. 이케아 제품들은 모조리 스칸디나비아식 이름을 갖고 있고, 이케아 카페에서는 스웨덴식 미트볼을 제공한다. 고객의 취향이 아니라 이케아의 취향이다. 영국에서 이케아는 영국식 취향ㅇ에 자신들의 생산 라인을 맞춘 것이 아니라 꽃무늬 원단을 좋아한다고 알려진 영국인들의 기호를 바꿔놓기 위해 공격적인 광고를 실시했다. 그리고 ‘오는 사람 안 막고 가는 사람 안 붙잡는다’라는 공격적인 저가 항공사들의 고객 관리 기법을 소매업에 적용했다.


8.

마크 뉴슨의 서프 제작소와 호주인다운 화사한 감수성이 1980년대 록히드 라운지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그것이 디자인의 역사에 모종의 이정표로 확립된 것은 리트벨트나 미스 반데어로에가 벌어들인 액수를 한참이나 웃도는 거의 1백만 달러에 가까운 경매가로 팔렸다는 사실이 알려진 후였다. 그 가격은 다른 요소들 못지않게 경매 회사의 시장 조성 능력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9.

디자인은 처음 별개의 직업으로 등장한 이후 줄곧 욕망을 조장하는데 쓰였다. 그 요점은 제작에서 형태를 만드는 일을 분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크 뉴슨이나 론 아라드의 작품들이 미술 갤러리에 등장하면서 일종의 위반 방지선을 이미 넘어선 셈이다.

디자인의 이념은 문제 해결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이제 우리에게는 물건에 대한 전혀 다른 범주가 제시되고 있다. 그 범주가 짧은 기간 안에 예술과 디자인이 사회적 위계에서 차지하는 상대적인 위치들을 뒤바꿔놓는 일에 큰 역할을 할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오래 못 갈지도 모르는, 이색적인 새로운 작업들의 폭발적 출현에 연료를 제공해주는 일은 분명히 해낼 것이다.


데얀 수직 지음

정지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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