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클로이는 오빠가 죽은 직후 [그녀가 막 여덟 살 생일을 지났을 때였다] 매우 철학적인 단계를 거치게 되었다. “나는 모든 것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어. 죽음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했거든. 그렇게 되면 누구라도 철학자가 되지.” 그녀의 가족들이 지금도 넌지시 이야기를 하곤 하는 그녀의 주요한 강박관념들 가운데 하나는 데카르트와 버클리의 독자들에게는 익숙한 것이다. 클로이는 자기 눈을 두 손으로 가리고 가족에게 오빠가 살아 있다고 말했다. 그녀에게 가족이 보이는 것과 똑같이 마음속에서 오빠가 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마음속에 오빠가 보이는데 왜 오빠가 죽었다고 하는가? 그녀는 거기서 더 나아가 실재(實在)에 더 큰 문제를 제기했다. 클로이는 부모에게 느끼던 감정 때문에, 그들에게 자신이 눈을 감고 그들을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을 죽일 수 있다고 [적대적인 충동의 힘과 마주한 여덟 살짜리 소녀답게 싱긋 웃으며] 말했던 것이다. 물론 이 계획은 부모에게서 심오하게 비철학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2.
물론 종교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진리의 가치는 수백 년 전부터 의심을 받았다. 파스칼[1623-62, 곱사등이 얀센파, 『팡세』의 저자]은 모든 기독교인이 신 없는 무시무시한 우주와 신이 존재하는 행복한, 그러나 훨씬 더 먼 우주로 불균등하게 나누어진 세계에서 선택에 직면해 있다고 말했다. 파스칼은 설사 신이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더라도, 그 작은 가능성이 주는 기쁨이 더 큰 가능성이 주는 혐오를 압도하기 때문에 신에 대한 우리의 신앙은 충분히 정당화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어쩌면 사랑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연인들은 오랫동안 철학자 노릇을 할 수가 없다. 연인들은 의심하고 캐물으려는 철학적 충동에 대립되는, 믿고 신앙을 가지려는 종교적 충동에 굴복한다. 연인들은 사랑 없이 의심을 하는 것보다는 틀려도 사랑을 하는 모험을 더 좋아한다.

3.
어쩌면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아주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하는 말을 이해하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제대로 말을 할 수 없다는 것도. 본질적으로 우리는 사랑을 받기 전에는 온전하게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4.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우리 자신에 대한 느낌은 달라진다. 우리는 조금씩 남들이 우리라고 생각하는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자아는 아메바에 비유할 수 있다. 아메바의 외벽은 탄력이 있어서 환경에 적응한다. 그렇다고 아메바에게 크기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자기의 규정적인 형태가 없을 뿐이다. 부조리한 사람은 나에게서 나의 부조리한 측면을 끌어낼 것이다. 그러나 진지한 사람은 나의 진지한 측면을 끌어낼 것이다. 누가 나를 수줍어한다고 생각하면, 나는 아마 결국 수줍어하게 될 것이다. 누가 나를 재미있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계속 농담을 할 가능성이 높다.

5.
어린 시절 내내 나는 겨울방학을 고대했다. 가족이 두 주 동안 알프스로 스키를 타러 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산꼭대기에 올라가 밑의 소나무로 덮인 골짜기와 위의 부서질 듯한 파란 하늘을 보면 실존적인 불안에 완전히 사로잡히곤 했다. 그러나 그 일에 대한 기억에는 그런 불안이 증발해버리고 없었다. 기억은 객관적인 조건들 [산꼭대기, 부서질 듯한 파란 날]로만 이루어져서, 실제 그 순간을 힘겹게 만들었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의 불안은 내가 코를 줄줄 흘렸거나, 목이 말랐거나, 목도리를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니었다. 한 해 내내 나를 위로해주었던 미래의 가능성 하나가 마침내 현실이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주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슬로프 바닥에 이르자마자 나는 산을 돌아보며 완벽한 활주였다고 혼자 되뇌었다. 스키를 탔던 방학은 [일반적으로 내 삶의 많은 부분도] 그렇게 흘러갔다. 아침의 기대, 현실에서의 불안, 저녁의 유쾌한 기억.

6.
“인간의 모든 불행의 자기 방에 혼자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생긴다.” 파스칼의 말이다. 맥없이 사회적 영역에 의존하는 것을 넘어서서, 자신의 독자적인 능력을 쌓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에서 이것을 성취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프루스트는 무하마드 2세의 이야기를 해준다. 그는 하렘의 한 아내를 사랑하게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자 즉시 그녀를 죽이게 했다. 다른 사람에게 영적으로 종속되어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무하마드 2세를 흉내내기는커녕, 오래 전에 자족성을 성취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렸다. 나는 내 방에서 나와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다른 인간에게 기초하여 자신의 삶을 구축하는 데서 오는 위험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7.
“문제를 말하면 진짜로 문제가 생겨.” 클로이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8.
영혼은 낙타의 속도로 움직인다는 아랍 속담이 있다. 우리 대부분은 시간표와 다이어리의 엄격한 요구에 이끌려 가지만, 마음의 자리인 영혼은 기억의 무게에 힘겨워함 노스탤지어에 젖어서 느릿느릿 뒤따라온다. 만일 모든 연애가 낙타에게 짐을 더 얹는 것이라면, 사랑의 짐의 의미에 따라서 영혼의 속도는 더 느려진다고 생각할 수 있다. 나의 낙타가 마침내 클로이의 기억이라는 엄청난 무게를 떨쳐버렸을 때, 낙타는 죽기 직전의 상태였다.

노스탤지어 : 고향을 몹시 그리워하는 마음. 또는 지난 시절에 대한 그리움.

9.
지혜는 우리에게 평정과 내적 평화를 목표로 삼으라고 말한다. 불안, 두려움, 우상숭배, 해로운 정열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라고 말한다. 지혜는 우리에게 우리의 첫 충동이 꼭 진실한 것은 아닐 수도 있다고, 이성을 훈련시켜서 무익한 요구와 진정한 요구를 분리하지 않으면 욕심 때문에 길을 잃을 수도 있다고 가르친다. 지혜는 우리에게 상상력을 통제하라고, 그러지 않으면 그것이 현실을 왜곡하여 산을 흙 둔덕으로, 개구리를 공주로 바꾸어버릴 수도 있다고 가르친다. 지혜는 우리에게 두려움을 제어하라고, 그래서 우리에게 해를 주는 것은 두려워하되 벽에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보고 에너지를 낭비하지는 말라고 가르친다. 지혜는 우리에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두려움 자체라고 가르친다.

알랭 드 보통 Alain de Botton
정영목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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