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따라서 약간의 과장을 보탠다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지각하고 인지하고 소통하고 행위하는 것은 누군가가 디자인한 인터페이스’들’을 통해서라고 말이다.

2.
패퍼트는 특정 언어를 배우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그 언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어린이가 수학의 언어를 습득하는 가장 좋은 방법 역시 이와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컴퓨터가 어린이와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그런 환경이 갖춰진다면 어떨까?
패퍼트는 이런 질문을 바탕으로 프랑스의 교육심리학자 장 피아제의 가르침에 따라, 어린이의 자율적인 학습 활동을 돕는 기계 친구로 컴퓨터 환경을 구성하려 했다. 패퍼트가 ‘수학나라’로 명명한 이 환경에서 어린이와 컴퓨터 사이에서 교감의 가교 역할을 하는 핵심 요소는, ‘터틀turtle’이라는 그림 그리는 로봇이었다. 어린이들은 터틀을 처음 대하고 난 뒤 얼마 동안은 그저 원격 조정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지만,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간단한 수학 공식을 활용해 LOGO 언어로 프로그램을 짜서 터틀에게 도형 그림을 그리도록 지시했다. 어린이들은 터틀을 매개로 컴퓨터와의 정서적 관계를 강화하면서, 수학의 논리와도 친숙해질 수 있었다.

3.
이런 논의를 종합해보면, 투시도법에 기원한 디자인 교육의 역사적 맥락을 좀 더 정교하게 고찰함과 동시에 다양한 모델링 인터페이스와 결합할 수 있는 새로운 디자인 사고와 조형 논리의 개발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컴퓨터의 모델링 인터페이스가 투시도법 기반의 그림 그리기를 완전히 대체할 것이라고 섣불리 결론 내릴 필요는 없다. 이 두 가지 모델링 인터페이스의 관계를 배타적인 것으로 설정하는 한, 이에 대한 논의는 양자택일의 소모적인 논쟁으로 귀결될 뿐이다. 다만 모델링 인터페이스가 다양화, 복수화됨에 따라 그것과 관계 맺는 디자인 사고나 조형 논리 역시 다양화, 복수화될 것이라고 추론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4.
스크린은 그 광물성 재료의 이물감 때문에 텔레비전 본체의 조형 질서에 통합되기 어려운 암초다. 하지만 역으로 스크린에게 있어 본체의 외형은 시청자가 몰입의 문턱을 넘어서는 데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달리 말하자면 본체의 외형에게 스크린은 결핍이며, 스크린에게 본체의 외형은 잉여인 것이다. 자누소와 자퍼는 이 결핍과 잉여의 비대칭적 관계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한 가지 타협안을 제시한다. 그것은 스크린이 수다를 떨 때와 침묵할 때, 즉 온•오프의 두 가지 경우를 분리해 각각에 맞게 제 역할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텔레비전은 전자의 경우에는 순수한 스크린으로, 후자의 경우에는 블랙박스의 미니멀한 오브제로 표현되었다. 브리온베가의 텔레비전은 ‘지킬 오브제’와 ‘하이드 스크린’이라는 1물 2역을 떠맡은 셈이었다. 시각적 상징화보다는 상화의 연출에 주목하는 것이 자누소와 자퍼가 취한 접근법의 요체였다.

5.
<비디오드롬Videodrome>

6.
유비쿼터스 컴퓨팅과 앰비언트 테크놀로지를 콘셉트의 밑거름으로 삼은 필립스사의 최근 디자인 프로젝트 <새로운 일상The New Everyday>은 ‘사라짐의 미학’을 생존의 핵심 전략으로 삼는다. 필립스사의 디자인 연구소 소장인 스테파노 마르자노Stefano Marzano는 이 프로젝트를 발표하기 몇 년 전에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나는 미래의 가정이 오늘날의 가정보다 과거의 가정에 보다 가깝지 않을까 예측한다. 오늘날 가정을 채우고 있는 블랙박스들은 사라질 것이며, 의자, 탁자, 침대처럼 좀 더 오랜 역사를 지닌 사물들이 무대 위에 오르게 될 것이다. 이러한 사물들은 태곳적부터 특정한 형태로 우리와 함께 생활해왔으며, 그 기능은 나름의 본질적인 형식을 갖추고 있다. 우리는 그 사물들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블랙박스의 사물들이 수행하는 기능(엔터테인먼트, 커뮤니케이션, 노동)은 시간을 초월해 존재할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최종적 형태는 아직 성취되지 못했다. 그것들은 좀 더 중요한 사물들, 즉 벽, 책장, 의자, 접시와 같은 사물들과 자유롭게 결합할 수 있다.
이런 입장은 <새로운 일상>에서 구체적인 모습을 갖추게 된다. 이 프로젝트에서 가전제품들은 박스 형태를 벗어던진 후, 눈에 거슬리지 않게 흔적도 없이 벽면으로 사라지거나 가구 오브제의 모양새를 흉내 내며 방 모퉁이에 조용히 서 있다. 즉 “보이지 않는 컴퓨터”라는 도널드 노먼의 시나리오와 유사한 노선을 밟으며, 가까운 미래에는 가전제품의 기존 모습이 가정의 풍경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예측하는 것이다.

7.
그렇다면 진도구란 무엇인가? <101가지 쓸모없는 일본의 발명품: 진도구의 예술>은 다음과 같이 진도구의 십계명을 정의한다.
1. 진도구는 실제적인 사용을 위한 것이 아니다.
2. 진도구는 분명히 존재한다.
3. 모든 진도구는 근본적으로 무정부주의적이다.
4. 진도구는 일상생활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
5. 진도구는 판매를 위한 상품이 아니다.
6. 진도구 제작에 있어 유머만이 유일한 동기는 아니다.
7. 진도구는 선전하거나 선동하지 않는다.
8. 진도구는 결코 금기가 아니다.
9. 진도구는 한 개인의 소유가 아니다.
10. 진도구는 선입견을 갖지 않는다.
위의 십계명이 암시하듯이 진도구는 순수외관의 정반대편에서 ‘순수기능’에 강박적으로 집착한다. 여기서 순수기능이란 실제적인 사용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잉여의 기능을 의미한다. 코를 풀기 쉽도록 머리 위에 걸고 다닐 수 있는 휴지 걸이, 막 끓인 라면을 식혀가면서 먹기 위해 선풍기를 장착한 젓가락, 안전한 보행을 위해 언제든지 차도에 깔 수 있는 두루마리식 횡단보도처럼 기발하지만 쓸모없어 보이는 아이디어들이 자주 언급되는 진도구의 대표적 사례들이다. 이것들이 암시하듯이, 진도구는 가능한 범위 안에서 가장 복잡하고 특수한 방식으로 필요와 기능의 인간중심적인 방정식을 내파해버린다.

8.
영국의 디자인 역사가 페니 스파크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독일은 과학의 이름으로 디자인을 팔며, 이탈리아는 예술의 이름으로, 북구는 공예품의 이름으로 디자인을 팔고, 미국은 비즈니스의 이름으로 디자인을 판다.”

9.
흥미로운 것은 이런 고난의 행보 덕분인지, 이 세대의 디자이너들 중 일부는 지난 세기에 찾아보기 힘들었던, 차라리 현대 미술과 호환될 법한 기이한 실험들을 진행하면서 자기 비평적인 태도로 디자인의 20세기적 신화를 해체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점이다. 혹시 지속적인 위기가 이들에게 미적 실험성과 조우할 수 있는 자율성의 공간을 일시적으로나마 개방해준 것일까?
물론 20세기의 디자인 역사를 훑어보면, 디자인이 예술과의 경계를 허물고자 했던 시도를 발견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지금의 실험적 시도는 이전과는 무척 다르다. 이전의 시도는 디자인 산업의 호황에 동승해, 상당 부분 낭만주의 예술관에 의지하면서 디자이너 자신의 자기표현 수단으로서 새로운 조형의 가능성을 여유롭게 탐색하는 것이었다. 반면, 최근의 시도들은 디자인 산업의 완연한 하향세에 따른 무기력증의 발현으로서, 디자인 산업의 구조 변동과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확산이 빚어낸 과도기의 틈새 공간으로 비집고 들어가, 일상의 문화적 경험을 바탕으로 기이한 인터페이스들의 복마전을 펼쳐 보인다.

10.
이들과는 달리 약간 모호한 정치적 태도를 견지하는 피터 앨런과 칼라 머레이는 <스킨테틱> 프로젝트를 통해 2020년의 미래에 거대 기업의 브랜드가 어떤 모습으로 변모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그리고 마스터 카드, 나이키, 샤넬을 사례 연구의 대상으로 삼아, 이 기업의 브랜드 전략이 유전공학이나 성형외과 기술과 결합될 가능성을 예측한다. 이들이 제안하는 마스터 카드와 나이키의 디자인 콘셉트는 1990년대의 사이버펑크 소설들이 묘사했던 미래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플라스틱 신용카드를 디지털 DNA로 대체해 손톱에 이식한다거나, 충격 완화를 위한 공기 펌프를 발바닥에 이식한다는 식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이런 질문도 가능해 보인다. 유명 여배우들이 들고 다니는 명품 핸드백을 신용카드로 살 수 있다면, 그 여배우의 코를 구입할 수는 없는 것일까? 더 나아가, 성형시술을 받는 김에 샤넬의 로고 패턴을 피부 조직에 이식받고 ‘명품’의 전신을 렌더링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박해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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