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칸트의 도덕철학을 이해하려면 그가 말하는 자유를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자유를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상태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칸트의 생각은 다르다. 그가 생각하는 자유는 좀더 엄격하고 까다로운 개념이다.
칸트의 논리는 이렇다. 다른 동물처럼 쾌락이나 고통 회피를 추구한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식욕과 욕구의 노예로 행동하는 것이다. 왜 그럴까?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행동은 우리 밖에 주어진 어떤 목적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허기를 달래려고 이 길로 가고, 갈증을 해소하려고 저 길로 간다.
예를 들어 아이스크림을 어떤 맛으로 주문할지 결정한다고 치자. 초콜릿? 바닐라? 아니면 에스프레소와 바삭한 과자를 얹은 아이스크림? 이는 언뜻 선택의 자유를 행사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어떤 맛이 내 기호에 가장 잘 맞는지 파악하는 행위이며, 여기서 내 기호는 애초에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칸트는 기호를 충족하는 행위를 문제 삼지 않는다. 다만 이때 우리는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이미 결정된 내용에 따라 행동할 뿐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바닐라보다 에스프레소와 과자가 들어간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다는 욕구는 내가 선택한 게 아니라 이미 갖고 있는 욕구일 뿐이다.
몇 년 전, 스프라이트 음료는 다음과 같은 광고 문구를 선보였다. “당신의 갈증에 복종하라.” 스프라이트는 광고에 (물론 우연이지만) 칸트의 통찰력을 담았다. 내가 스프라이트 캔 하나를 집어들 때면, 자유가 아니라 복종을 실천하는 셈이다. 그것은 내가 선택하지 않은 욕구에 반응하고, 내 갈증에 복종하는 행위다.

2.
칸트가 말하는 자율적 행동의 의미를 이해하는 한 가지 방법은 그 반대 개념과 대조하는 것이다. 칸트는 ‘타율’이라는 말을 만들어 이를 포착했다. 내가 타율적으로 행동한다면, 내 밖에 주어진 결정에 따라 행동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설명해보자. 당구공을 손에서 놓으면, 공은 땅에 떨어진다. 이것은 공의 자유로운 행위가 아니다. 공의 움직임은 자연법칙, 그러니까 중력의 법칙에 지배받는다.
이번에는 내가 다른 사람 머리 위로 떨어져 그 사람이 죽었다고 가정해보자. 나는 그 불행한 죽음에 도덕적 책임이 없을 것이다. 당구공이 높은 곳에서 누군가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고 해서 당구공에게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두 가지 경우에 떨어지는 물체, 즉 나와 당구공은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둘 다 중력의 법칙에 지배받는다. 여기에는 자율이 작용하지 않았기에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여기서 자율로서의 자유와 칸트가 말하는 도덕의 연관관계를 볼 수 잇다. 자유로운 행동은 주어진 목적에 걸맞은 최선의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를 선택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만이 할 수 있고 당구공은 할 수 없는 선택이다.

3.
고대에는 오늘날보다 목적론적 사고가 더 흔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불이 위로 솟는 이유는 본래의 자리인 하늘에 닿기 위해서고, 돌이 아래로 떨어지는 이유는 원래 속해 있던 땅에 가까워지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자연은 의미 있는 질서에 따라 움직인다고 여기던 시절이었다. 자연을 이해하고 그곳에서 우리 위치를 이해하는 것은 곧 자연의 목적과 본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4.
곰돌이 푸는 나무 발치에 앉아 머리를 발바닥 사이에 두고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푸는 먼저 이렇게 중얼거렷어요. “저 윙윙거리는 소리에는 뭔가 뜻이 있어. 아무 뜻도 없이 저렇게 그냥 윙, 윙 할 리는 없다고. 윙윙 소리가 난다면, 누가 일부러 윙윙 소리를 내는 거야. 윙윙 소리를 내는 이유는 ‘내가’ 알기로 딱 하나, 저기 꿀벌이 있다는 뜻이지.”
푸는 다시 한참 생각하다가 말했어요. “그리고 저기 꿀벌이 있는 이유는 ‘내가’ 알기로 딱 하나, 꿀을 만들기 위해서야.”
그러더니 푸는 일어나서 말했어요. “그리고 꿀을 만드는 이유는 ‘내가’ 알기로 딱 하나, ‘나더러’ 그걸 먹으라는 이야기지.” 푸는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가기 시작했어요.

5.
모든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찬양하는 시민권을 누리지는 못했다. 여성은 자격이 없었고, 노예도 마찬가지였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여성과 노예의 본성은 시민이 되기에 적절치 않다. 지금 생각하면 누가 봐도 부당한 일이다. 그런데 이 부당함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런 주장을 한 뒤로도 2000년 이상 지속되었다. 미국에서도 노예제는 1865년까지 폐지되지 않았고, 여성은 1920년에야 비로소 투표권을 얻었다.

Michael J. Sandel
이창신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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